■ 現代안에 神의 나라를 平信者 團體組織 시급 平信者使徒職의 根源⇒그리스도
◇ 信使徒職의 基本精神 / <강사 董민성 주교(大田敎區長·主敎)>
평신자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 사도직의 의무와 권한을 갖게되는 것이다. 성세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가 되고 견진성사를 통해 성신의 권능으로 굳세어진 각 신자는 전세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연의 제반사정을 성화함으로 우리주위의 모든 이가 덕행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은총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아야 하겠다. 그런데 이 은총은 성사를 통해 내리며 평신자들의 첫 의무는 성사를 통해 받은 은총을 지상의 사정으로 유도하는 그것이다. 사색의 분야만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은총 안에서 가장 깊은 발전을 이룩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신앙이 왕성하던 그 시대의 정신력은 오늘날 신앙이 약화하면서 혼미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사회의 질서와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사회의 모든 사정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은총으로 현세를 재성화해서 지금까지 장애물로 있던 현세의 제반사항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야 하겠다. 우리가 하는 일상생활과 그 과업이 한마디로 우리의 종교생활의 터전이며 하느님께로 가는 노정으로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해야하는 과업을 알았다. 그러나 이는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협동해야 하며 이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고 넓고 힘있는 단체인 회의 일원으로 전교회와 같이 해야하는 것이다.
◇平信者世界 大會報告 / <강사 柳洪烈 교수(成均館大교수·文博>
나는 지난해 10월 11일부터 18일까지의 사이에 「로마」에서 열린 제3차 세계평신자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번 대회에는 103개 국가로부터 3086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그중에는 가톨릭신자가 아닌 프로테스탄트대표도 88명이나 있었다. 우리나라대표는 주교 1명, 신부 4명, 평복수녀 6명, 평신자8 명 등 모두 19명이었는데 그중 본국에서 직접 참석한 이는 5명이었다.
이번 대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사이에 열린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결과로 반포된 교회쇄신에 관한 여러가지 언장선언 및 교령이 세계 각국에 있어서 어떻게 시행되고 또 시행될 것이냐 하는 공동문제를 연구토론 하기 위하여 열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대회의 대주제(大主題)는 「인간여로(旅路)에 있는 천주의 백성」이었는데 이것은 다시 「오늘의 인간」과 「교회쇄신에 있어서의 평신자」라는 소주제로 나누어 날자를 달리하여 토의되고 그에 앞서 각각 소주제에 관한 특별강연이 있었다. 이러한 두가지 주제는 다시 각각 8분과로 나누어 다른 장소에서 토의되었는데 각분과는 다시 영·독·불·스페인의 언어별로 나누어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분과에서 결정된 안건이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각국대표 단장회에서 민주적 방법으로 표결됨으로써 결정되었다. 단장회의에 상정된 안건은 모두 17건이었으나 그중 표결로써 채택된 안건은 다음과 같은 8건이었다. ①인종차별의 철폐 ②모든 억압에 대한 투쟁 ③평화와 세계공동체 실현 ④사회발전의 균형유지(가난한 나라에의 원조) ⑤교회 안에서 여성지위(남녀동권승인) ⑥언론자유보장 ⑦불구자 구제 ⑧세계적 평신자기구 결성 촉진 이밖에 교회재일치분과회에서 채택되어 때마침 열리고 있던 제1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전달된 안건으로 혼종혼(混宗婚) 승인에 관한 결의안이 있었다.
이렇듯이 이번 대회에서는 교회안의 문제뿐만아니라 전세계의 평화실현에 관한 문제 등 그야말로 사목적 교회의 변모를 시사한 인간에 관계된 모든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전인류의 평화를 실현하기위하여 평신자들은 성직자들과 함께 교회안팎에서 일을 하여야 하며 모든 선의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국가별로 평신자기구가 민주적 방식으로 결성되어야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하루바삐 실현되어야하겠다. <계속>
■ 낙오자 되기 前에 韓國敎會 社會適應 서둘러야 聖職者들은 西洋化 貴族化 막고
◇擧論된 是正돼야 할 問題
이번 광주의 「심포지움」은 강연에 이어 질의응답·다과시간 공동집전 미사·토론회, 소 「그룹」토의 등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소「그룹」 토의시간에는 학생들이 의제가 따로 마련된 각 「그룹」에 자유로이 참여하여 임석한 토의 지도자들과 대화했는데 의제는 「사제가 본 이상적인 평신자 상」(장익 신부). 「평신자 사도직의 역」(주매분 수녀).「평신자의 이상적 사제상」(서정호 교수). 「한국 평신사도직의 활동」(유흥열 교수). 「사제와 평신자의 관계」(이태재 교수). 「한국교회쇄신의 당면문제」(박태봉 선생). 「한국 평신사도직의 조직문제」(노영택 선생). 「평신자의 계몽문제」(김양순 선생) 등이었고 강연장에서 회원 전체가 모인 가운데 열린 토론회에서는 연사들이 근본적으로 파헤친 여러가지 문제들에 질렸는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주목을 끈 발언들을 소개하면 『신자들이 교회법에 억매여 아무 활동도 못하는 느낌이 든다. 활동을 하려면 죄를 적당히 지을줄 알아야 되지 않겠나?』 『신부들은 겸손한 태도로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귀족화 되지 말아야하며 「해라」하지 말고 존대말을 써야한다.』 『프로테스탄은 교회당을 지어놓고 목사를 모셔오는데 가톨릭신자들은 교회당국만 쳐다보고 있다』 『본당은 신자들에 의하여 운영돼야 한다.』 『신부는 지도자로서 모든 이에게 교육의장(場)을 제공해야 한다.』 『프로테스탄 대학은 일류가 있으나 가톨릭대학은 일류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웅변하나? 이 현상은 미국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교회내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들도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다.』… 그리고 본보의 「디알로그」란에 계재된 『제사문제」가 의제로 등장 되는가 하면 강화사건도 거론되었다.
■ 誤謬없이 배우고·가르치는 平信徒 無謬性 闡明
◇敎會와 平信者의 가르칠 職務 / <강사 양리완 신부>
2월 15일 3시 「교회와 평신자의 가르치는 직무」를 연제로한 양리완 신부의 강연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속이라고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선언했다.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심과 같이 교회도 하느님의 한 백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신적(神的)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통해 알려지는 것과 같이 교회에 있어서도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통해 알려진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직자단과 평신자단으로 형성되며 전자는 교회를 위해 신적인 공헌을 하고 후자는 인간적인 공헌을 한다. 교회는 평신자를 통하여 세속에서 활동하며 세속은 평신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발견한다.
신앙문제에 대한 교회의 무류성에는 주교단의 무류성과 평신도단의 부류성이 있으며 이에 따른 두가지지 무가 있음을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인정해왔다. 성신께서는 주교들이 오류(誤謬)를 가르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도우시며 또한 신자들이 오류를 믿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신다. 오류없이 가르치더라도 오류없이 배울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교황 비오 12세도 마리아의 피승천(被昇天)을 신앙교리로 선언한 헌장에서 신자들의 무류성을 지적한 바 있으며, 현대의 유명한 신학자 꽁가르 신부는 『크리스찬의 신앙은 신자들 중에서 생동하며, 윤리와 신비면에 뿐아니라 사고의 세계까지도 그 영향을 미친다… 신자들은 주교들이 권위있게 제시한 자료를 받아들이고 고찰하고 정리하고 발전시킬 임무가 있다』고 말했다. 교회안에는 평신도만이 가진 고유하고 정당한 가르치는 직무가 있다.
성숙하고 자립적인 평신자의 가르치는 직무는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역력히 예증된다. 원죄없으신 잉태축일을 지내는 풍속은 11세기 초에 동방에서 서방에로 전파되었다. 이 「새로운」 신심은 즉 시베르나르도 성인의 공격을 받았는데 성인은 『마리아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셨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지 않으신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했고 13세기 스콜라 학파의 대가들인 설 알베르또 성 토마스, 성 보나벤투라도 이에 동조하는 등,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같은 의견을 내 세웠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의견일치에도 불구하고 평신자들은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형태에 대한 자기들의 가톨릭적 신앙과 신심을 계속 표현하여 15세기말에 와서는 교회전체에서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전례로써 기념하게 됐다. 평신도들은 이 축일을 처음으로 도입, 전파함으로써 이 교리가 믿을 교리로 천명되는 예비작업을 전개했고 신학자들의 연구와 토론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뉴먼 추기경도 『가톨릭신자들이 이 교리를 믿게된 것은 그것이 신앙교리로 정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신앙교리로 정의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사실을 「우연한 역사적 사건」으로 속단해서는 안된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칼·아담은 『우리가 믿는 대부분의 신앙교리를 해석하고 발전시키는데도 이와 꼭같은 과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실증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개하고 완성하는 과정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신적 계시의 내용이되는 자료를 잉태시켜주는 성직자의 부성적(父性的) 요소이요, 하나는 『씨를 받고 양육하여 성숙케하는』 평신자의 모성적(母性的) 요소이다. 그리고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에서 평신자는 그리스도의(교회의)예언적 (또는 가르치는) 직무에 실제로 참여한다고 제일 먼저 선언했다.
평신자는 또한 영원한 복음을 각 시대와 각 문화에 알맞게 그 진리와 미를 구현할 수 있도록 새로이 꾸며줄 임무가 있다. 요컨대, 복음은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므로 교회는 각 시대 각 국민들에게 할 말이 반드시 있으며 각 시대 각 국민도 교회에 대하 여 할 말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속간에는 기독교 복음과 세속문화 간에는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자들은 교회안의 여론을 형성한다.
교황 비오 12세는 「여론은 정상적인 사회라면 어느 인간사회에나 있는 특징이며… 여론결핍 현상에는 반드시 어떤 악질성 질병이 사회생활에 만연돼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평신자를 통해 교회는 인간사회의 생명적 원천이 된다』고 언명한바 있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위해 교회는 주체성이 선명한 평신자를 양성해야 한다. 평신자는 절제없는 비난을 일삼아서도 안되겠지만 반대로 노예와 같이 함구무언하는 일이 없어야 겠다. 한편 성직자들은 평신자에게 노예와 같은 맹종을 기대하여서도 안되며 평신자한테 비난을 받았다고 놀래거나 상심하여서도 안된다.
한국문화는 현재 단순히 변화하고 있다기보다 어떤 분야에서는 급진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 보조를 맞춘 적응이 필요하며 그것이 지금 당장 요구되고 있다. 이 적용작업을 지금 시작하지 아니하면 한국교회는 다만 세속문화에 뒤떨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낙오자가 될 우려가 있다. 또한 사적으로 보아 한국교회는 장구한 동양문화 속에 도입된 비교적 최근의 서양문물이므로 한국교회는 현대화돼야 할 뿐아니라 한국화 돼야 한다. 한국문화는 미국문화가 될 수는 없다.
2월 16일 오전 9시에 유흥렬 교수는 「한국교회 평신자의 역사」를 차근차근히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얘기하여 청중들로부터 유교수의 공로를 찬양하는 특별(?) 박수까지 받았다. 유교수는 특히 한국교회는 평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영입(迎入)·설립했으며, 기초를 굳건히 해왔음을 강조했다. 유교수의 강의 내용은 「한국 천주교회사(유흥열)를 읽어주기를 권유하면서 지면관계로 생한다.
이날 오전 10시 30분에는 서정호 교수가 「교권 민주주의와 교회의 민주주의」를 강연했다.
서교수는 『교권자체가 민주적이 아니며 일반정치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교권은 가르치는 권리요 다스리는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세계의 유행어가 돼있는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한 자유와 평등이 그 실질적인 내용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교수는 『인간의 기본권을 가장 높은 가치로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내용은 형식적인 제도로서는 이룩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 독일의 헌법이 힛틀러의 독재를 낳은 사실을 지적했다.
현대 세계 모든 국가의 국회가 미약해지고 국회의원의 질이 낮아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서교수는 「매스·콤」의 영향력이 현대 인간생활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음을 강조한 후,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제시된 인간의 기본권들을 열거하고, 올바른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평신자의 권리와 의무이며 사랑과 존경으로써 이를 이행해야 된다고 말했다. <끝> 【文責은 記者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