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題(화제)를 찾아서] 67년 향토문화상 탄 馬山(마산)의 李庚俊(이경준) 여사
적수공권 … 오직 고아 기르기에 전력
동기는 양친 잃은 재종질 양육서부터
派越(파월)중인 강군 誠金(성금) 본인 위해 저축해
【마산】 공보부가 마련한 67년도(제6회) 향토문화상 수상자인 이 엘리사벳(李庚俊) 여사를 찾아서 마산 「완월동」 성지여고 ㅉ고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자리잡은 소화(小花)보육원을 방문했다.
기자가 찾았을 때 이 여사는 마침 검소한 차림으로 고아들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귀밑머리가 희도록 60평생을 동정을 지키면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선친의 유산을 털어서 1백십여명의 고아를 거느리고 어려운 살림을 꾸리며 16년간을 고아사업에 몸을 바친 업적으로 이번의 영광을 차지하기까지 숨어있는 이야기는 허다하다.
경남 밀양(密陽)에서 어느 부농가(富農家)의 9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난 이 여사는 어려서부터 성당일을 도와주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1927년 삼랑진성당이 신설되자 배 가오로(불란서인) 신부 밑에서 6년간을 풍금도 치고 사무와 모든 일을 맡아 보다가 오빠들이 세상을 떠나자 노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결혼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1933년 배 신부를 따라 선친의 재산을 정리하고 마산 완월동 206번지(지금 성지여고자리)에 이사를 했다가 학교에 부지를 양보하고 조금 아래 지금의 자리에다 1953년 6월 고아원을 창설했다.
이 여사가 고아원을 경영하게된 동기는 양친을 잃은 재종질 이기창(지금 마산고등학교 3년)군을 맡아 키우면서 부모없는 아이들의 고독을 뼈저리게 느껴서 부터라고 한다. 이 여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날 집문간에 한 여아가 버려져 잇었다. 그후 6·25 사변으로 인해 고아가 늘어난 마산시 당국에서는 이 여사에게 아이를 맡기기 시작했다. 책임감이 강하고 인정스러운 이 여사는 고아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나날이 늘어가는 고아들을 먹여 살릴 길은 막연하고 선친의 유산을 팔아댔으나 우물에 돌집어 넣기였다.
이웃으로부터 많은 동정을 받았으나 그것으로도 너무 부족하여 막연하던 중 어느 원조기관(지금의 부산 하아리아부대)에서 사회사업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막상 찾아갔으나 60여 고아원에서 서로 받겠다고 혈안인지라 희망을 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읍니다』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결정이 되었을 때는 기뻐서 한없이 울었었다고 15년전을 술회했다.
그 원조로 건물은 지었으나 어려운 살림은 계속됐다. 하루는 기독교구호사업기관의 스완슨 목사가 찾아와서 프로테스탄으로 개종하면 얼마든지 원조해 주겠다고 했으나 끝내 버티면서 「돼지」를 티우고 채소를 심고 해서 자립을 해왔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부산 최 주교님을 비롯하여 소 신부와 NCWC 그리고 시 당국의 원조로 지금은 어려움을 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여사가 16년을 하루같이 지나오면서 겪은 인정가화(人情佳話)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약2년전 분도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을 때 이 여사의 품에서 12년을 자란 파월장병인 강세창군이 월남에서 소식을 듣고 봉급을 털어서 세차례에 걸쳐 3만5천원을 약값에 쓰라고 보내온 눈물겨운 사실. 그러나 이 여사는 한푼도 쓰지 않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서 저축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 신부님이 일금 50만환이 든 봉투를 전하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8월 15일엔 은인들을 위하여 미사를 드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