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4) <第一話(제1화)> 나를 만나보시려면 ④
발행일1968-03-10 [제609호, 4면]
마음이 허전하였다. 섭섭하였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쌀쌀한 대접을 받을 때처럼 심정이 쓰라리었다. 마음이 비틀어져서 외따로 있지마는 이제 멀지 않아 그 사람은 따뜻한 손길로 위무하며 모든 것을 흐뭇하게 풀어줄 것이다.
그 때까지 지금의 허전한 마음은 오히려 애교나 장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따뜻한 손길은 다가오지 않았고 그것이 다가오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러나 참말이었다. 소리쳐 본다. 휑 덩글한 공간에 자기의 외침이 헛되이 메아리친 뿐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그러나 바위처럼 엄숙한 현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서리가 내린다. 마음속에 눈보라가 친다. 그것은 이윽고 용의 꼬리처럼 공간을 구비치며 맴돈다. 손이 서럽다. 뼈가 저리다. 마음이 얼어붙는다.
「아아!」
하고 마음 밑바닥에서 나오는 무서운 고함을 치다가 승재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이었다. 아마 시간이 꽤 늦은 모양이었다. 미닫이에 제법 밝은 햇빛이 비치었다. 그러나 집안은 고요하였다. 승재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옆구리가 결린다. 팔이 끊어지는 것 같다. 어깨도 움직일 수 없게 아프다. 어제밤에 넘어질때 다친 모양이다. 간신히 팔을 늘여 머리맡에 놓은 손목시계를 집어 보았다. 세시에 가서 서 있다. 아마 너머질때 시계도 고장이 난 모양이다.
『철아!』
승재는 둘째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가장 영리하여 아버지의 시중을 잘드는 놈이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다. 아니 승재는 이런때 으례
『여보!』
하고 불러야할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불러도 재빨리 알아듣고 나타나는 것이 아내 은희이었다.
그러나 은희라는 이름은 이제 빈 껍데기만 남았고 그대신 승재는 어린 아들의 리름을 불러야 하게된 것이다. 이제 석달동안에 많이 길이 든 셈이지 마는 그래도 자고난 떨떠름한 마음으로는 여전히 새롭게 서글퍼진다.
『철아!』
승재는 좀 더 크게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고 집안은 고요하다. 송재의 목소리만 이 휑덩골하게 허공에 울릴 뿐이었다.
어쩌면 방금 깨어난 꿈과 비슷하다고 승재는 생각하였다. 상당히 늦은 모양인데 몇시나 되었을까? 오늘은 꼼짝없이 회사는 결근을 한거고, 그렇다 치더라도 식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승재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었다. 옆구리가 걸려서 입이 딱 벌어진다. 어깨가 쑤시고 골이 터질듯이 팬다. 그러나 억지로 참고 일어나 양복장 문을 열었다. 집에서 입는 한복을 갈아입으려는 것이다. 한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이들의 옷이 바닥에 개켜져 있다. 들쳐본다. 없다. 빼다지가 아래에 두개가 있다. 집에서 입는 옷이 거기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지마는 그것밖에 열어볼 것이 없다. 위 빼다지를 열었다. 승재와 아이들의 여름옷이 단정히 들어있다. 아래 빼다지를 열어본다. 잠겼다. 열쇠가 없다. 홧김에 그대로 잡아다리니 튼튼치 못한 빼다지는 삑하며 비명을 지르고 그대로 쑥 빠져버린다.
『앗!』
거기에는 은희의 옷이 들어 있었다. 몸은 땅에 묻혀서 이미 석달인데 그 몸에 걸쳤던 옷은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서 양복장 빼다지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승재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한가지를 접어들었다. 저고리다. 봄 저고리다. 그것을 입고 아이들을 데리고 점심을 장만해 가지고 창경원으로 교외로 다니던 바로 그 저고리이다. 처음으로 해입고 승재에게 앞뒤로 웃맵씨를 보이며 어떠냐고 묻던 그런 저고리 가운데 하나이다. 좋다고 대답하면 만족한 듯이 미소짓던 그 저고리이다.
『은희, 당신의 저고리는 여기 있는데 그래 당신은 어디로 갔오?』
승재는 자기도 모르게 저고리를 글어 안았다. 가슴이 뭉클하다. 눈시울이 뜨거워 온다.
『은희!』
승재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면서 최근 석달동안 거의 습관이 된대로 머리맡 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승재는 깜짝 놀랐다. 으례 걸려 있어야할 아내의 사 진이 보이지 않는다. 액자에는 아내의 사진대신 풍경화가 들어있지 않는가?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흥!』
하고 승재는 눈을 흘기었다. 집안은 여전히 잠잠 하다. 누님도 정이도 아이들도 모두 없었다. 아마 승재 하나만 남겨놓고 모조리 다 어디론가 가버린 것과도 같았다. 승재는 빼다지를 닫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것잡을 수 없이 골이 팬다.
『철아!』
그는 큰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집안이 찌르릉하고 울렸다. 이 때 가볍게 대문소리가 나며 재빨리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미닫이 바깥에서 낮으막히 목소리가 났다.
『잠깨셨나요』
정옥이었다.
승재는 순간 불쾌한 생각이 왈칸 솟구친다.
『그런데 내한복 어디갔지요?』
승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님께서 발치 요밑에 넣어 두시던데요』
정욱의 대답은 침착하고 고요하였다.
『누님은 어디 제시지오? 아이들…』
『아주머니는 새벽차에 시골로 내려가시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어요』
『이거 우선 회사에 전화를 걸어야 할텐데…』
『제가 지금 나가서 걸고 왔어요. 달게 주무시기에 꼬마들을 집을 보이고 잠시 나갔더니 글쎄 이것들이 그 새를 못참고 어디로 가버렸군요.』
『지금 몇시나 되었읍니까?』
『열시가 넘었어요.』
승재는 한복을 찾아 갈아입고 마루로 나왔다. 거기 정옥이가 서 있었다. 장을 보아 왔는지 툇마루에 망태기가 놓였다.
『그런데 안방에 사진들을 누가 건드렸읍니까?』
승재의 날카로운 물음에 정옥은 말없이 얼굴을 들어 고요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