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르노 · 이태리 NC】 수년간 중공강제수용소에 갇혔던 탓으로 신품을 받지 못했던 43세의 한 「살레지오」 수도회원이 4월 29일 이곳 성당서 마침내 사제로 서품됐다.
요셉 호라는 이 사제는 폴투갈령 「마카오」에서 1923년 5월 27일에 태어났는데 가족이 수대 대려온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에 그도 아버지나 아저씨처럼 「마카오」의 「살레지오」신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3년과정의 견습기의 반을 넘긴 1949년에 중국은 공산당이 휩쓸어버렸다.
이때부터 그의 수난이 시작됐다.
공산당은 그로하여금 선배 외국서직자들에게 거짓과 조작된 죄상을 뒤집어씌우도록 소위 「공개재판」을 강요했고 이런 죄명을 쓰고 거의 모든 외국성직자들이 추방됐다. 그는 선배의 과업을 이어 「칸톤」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감시가 심했고 공사주의를 믿지않는다고 그를 괴롭혔다.
「호」 신부는 최근에 가졌던 한 회견에서 소위 「자기 비판」을 비롯한 집단 상호 감시 생활 등 공산치하의 중공에서의 교인들의 수난을 폭로했다. 그는 중공에서 국가대표 축구 「팀」에 뽑혔던 일에 싫증이나 결혼을 핑계로 「칸톤」으로 돌아와 거기서 주교와 수녀들의 협조로 고등학교 축구 「코치」로 지내다가 1955년 10월 주교와 일단의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시베리아」 변경에 끌려갔다.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하루 한그릇의 밥과 썩은 감자와 식기를 닦은 물로 갈증을 덜어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다 1963년 1월 마침 죄수들의 작업대열에서 탈출하여 몇벌의 옷을 팔아 차비로 쓰면서 4천 「마일」의 길을 몇차례의 위기를 겪은 끝에 「칸톤」에 돌아왔다. 그뒤 그는 교인들과 특히 전 고등학교 제자의 도움으로 21일간 은신한 뒤 고깃배로 공포의 하룻밤을 지샌 끝에 「홍콩」으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바로 1963년 2월 8일이었다. 호 신부는 15년의 수난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로 그 「살레지오」 수도원의 문을 두드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처음 문지기는 나의 남루한 꼴을 보고 거지로 알고 쫓아버리려 했으나 다행히 이태리인 수사가 나와 나의 사정을 듣고 원장에게 알렸다. 그뒤엔 환영잔치가 베풀어졌고 나로하여금 이태리에 오게하고 서품을 받게한 신앙생활의 제2부(第二部)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