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③
典禮生活化(전례생활화) 共同體(공동체) 基盤(기반)
敎會(교회) 倍養(배양)·保存(보존)의 元素(원소)
어떤 禮式(예식)은 講義時間(강의시간) 같아
미사중告解(告解), 마치 宴會(연회) 無秩序化(무질서화)하는 것
「信者(신자)의 기도」必須(필수)·改革(개혁) 運動史(운동사)는 50年(년)
典禮(전례)와 共同體(공동체)
전례운동은 약5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 현대전례운동의 창시자인 보두인 신부가 한번은 어떤 대회에서 전례의 사목적 관점에 대해서 강연을 할려고 교육위원회에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교육위원회는 전례는 예술위원회의 소관이라고 거절했다. 그러다가 마침 다행히도 교육위원회에서 강연하기로 되어있었던 한평신자 친구가 있어서 신부는 그에게 부탁하여 자기의 생각을 대신해서 강연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보두인 신부 자신도 청중속에 앉아 그 강연을 듣고 있었는데, 그때 그의 바로 옆에는 어떤 노동조합장이 앉아 있었다. 평신자가 보두인 신부의 생각을 대변하는 도중에 그 조합장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보두인 신부한테 고개를 돌려 속삭이기를 『우리는 사회사업가를 필요로하는데, 저 사람은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미사에 복사하는 아이들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군요』 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전혀 전례가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것이 사회생활에도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동체는 전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공동체 없이 전례가 있을 수 없고 공동체 없는 전례는 전례의 기본형태를 피폐시킬 것이다.
전례에서는 항상 교회를 공동체로 보고 취급했다. 전례는 항상 공적인 것이며 결코의 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전례를 통해서 교회는 창립되고 보강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신자가 과연 지금까지 이런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는지? 영세때에, 지금까지 어떤 예절 또는 어떤 말들이 영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 주었는지? 견진때에는 어떤 말들이 그로 말미암아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었는지?
미사는 ____께 하는 성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업시간이나 또는 어떤 연극장면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약한 것은 평미사(사제 혼자 경문을 외우는)에 있어서 공동성이 전혀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같이 모여서 이루는 성찬으로 세우셨다. 그런데 실상 평미사는 하나의 「칵텔」 파티만도 못하다. 고해소는 죄의 사회적 관점이 표현되지 않는 전화실과 비길 수 있다. 고해는 항상 「말씀의 전례」와 연결돼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함께 그들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 사하여 주심을 빌 때만이 비로소 죄의 사회적 관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사 중의 고해는 질서의 문란이다. 만일 국가 원수가 어떤 연회에 초대되었다면 손님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다 전화통 있는 대로 나갈 수 있겠는지? 그렇게 된다면 식탁예모를 벗어난 짓이 될 것이다. 미사 중의 고해는 이와 꼭 같은 짓이다.
끝으로 신자들의 기도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다. 공의회는 신자들이 어떤 개인의 필요를 표현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필요한 사정을 위해 전체가 기도하게끔 신자들의 기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관습으로 교회와 본당의 공동성에 대한 느낌을 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본당에서는 아직도 자들의 기도를 실행하고 있지 않다. 아직도 이를 실천하지 않는 본당신부님들께 「사목」지 제1호 37「페지」에 실린 필자의 글을 읽어 주시도록 권하고 싶다.
전례헌장은 전례의 공동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례행위는 사적행위가 아니라 「일치의 성사」인 성교회의 식전이다. 그러므로 전례행위는 성교회의 몸 전체에 관계되고 또한 그 몸을 드러내며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26조)
예절이 공동체에 있어서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 들을때 비로소 전례 본연의 힘을 발휘시킬 수 있다. 그래서 전례는 역시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또한 강하게 해줄 것이다.
이런 뜻에서 전례는 공산주의를 막는 요새라 할 수 있다. 전례운동은 신자를 복사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적 공동체를 이룩해서 사회사업을 훈련하기 위한 가장 좋은 토대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례는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새로운 자극을 줄 것이다. 전례는 사회감각을 고무 한다. 사람들이 제단에서 옆사람과 그리스도 안에 일치되었다면 실생활에서 옆사람의 괴로워함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계속)
白쁠라치도(神博·왜관보좌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