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띠마 巡禮記(순례기) ① 발톱을 잃은 성모상
한없이 드높은 가을 하늘에서 허허벌판의 황무지 「파띠마」
純白聖衣(순백성의) 휘날리는듯
광활한 땅 위에 성지 造成(조성) 벅차게
은혜로운 나무는 다 잘리고
사흘 예정으로 「파띠마」의 성모님을 찾아간 것이 56년 8월 20일이었으니까 벌써 11년전 옛날 이야기다.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지금은 「파띠마」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으리라. 순례자의 수는 해가 갈수록 많아지고 성모님의 발현의 의의 또한 더욱 새로워지는데 구태의연(舊態依然) 변할줄 모르는 나의 신심은 왜 이꼴이냐?
우리 일행을 위하여 「루르드」와 「파띠마」 순례를 정점으로 하여 프랑스 스페인 폴투갈 등 각국의 가톨릭운동을 알아보게 하려는 여행을 계획하고 주선하시고 인솔해 주신 李 히지노 신부(현 구포본당)님은 도착 즉시로 관리본부에 교섭하여 내일 아침 일곱시에 성모님발현경당(敬堂)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대단한 권리다. 제대는 하나뿐인데 수10명의 순례온 국내외 주교신부님들은 다투어 이 영광스러운 제대에서 미사를 드려보겠다는 것이다.
▲「파띠마」촌,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 「꼬바 다 이리아」는 허허벌판. 가도 가도 석회석이요, 「오리브」의 관목(관木)들 사이로 돌도토리 나무들뿐. 서해안 가까이의 황무지다. 염천 성하(炎天 盛夏)의 아열대 지방이지만 우리나라 초가을처럼 청량한 공기에 푸른 하늘이 한없이 높아 저 하늘에서 순백의 성의를 휘날리며 성모님이 지금 곧 내려오시는 것만 같다.
이 광활한 지역 수만정보를 교구에서 확보하여 교회관계 건물들을 위한 용지로 사용하고 일체의 잡상들이 접근할 수 없게 했으며 문자 그대로 성지답게 했다. 발현하신 지점 「꼬바 다 이리아」를 중심으로 15만2천평방 「미터」 이상의 구내에 46년에 헌당한 성모대성당을 중심으로 거대한 건설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규모는 「로마」의 「베드루」 대성당 광장의 2배 이상에 해당하는 넓이인 것이다.
성모 대성당 전면 약간 왼편 다시 말하면 이 넓은 광장 안창 왼편 구석에는 우리나라 시골동구(洞口)에 흔히 볼 수 있는 느티나무 같은 큰 돌참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이 자리에 처음에는 조그마한 돌참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위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그 당시의 나무는 「신비로운 광채」를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로운 나무라고 다 잘라가고 그 자리에 다시 심은 것이 지금의 저 거목이라고 한다.
그 앞에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너댓평쯤 되어보이는 조그마한 경당이 있다. 이 자리가 곧 세 어린이가 꿇어 영적을 본 바로 그 자리다. 성모님이 발현하신지 3년후에 이 지방 사람들이 조그마한 경당을 지어 이 세기의 기적을 기념하고 여기서 성모님을 공경했던 것이다. 이 「꼬바 다 이리아」의 첫번 집을 옛모습 그대로 두어 지금도 이 협소한 자리에서 미사를 올리겠다고 순례온 성직자들은 서로 앞을 다툰다.
우리 일행중에서는 李 히지노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李 신부님께 맹렬히 운동하여 복사할 권리를 땄던 것이다. 이 제대 정면에는 아름다운 성모상을 모셨으니 이 성모상이 바로 처음에 기적의 빛을 보고 가지며 잎들을 잘리우고 남은 나무둥치로 깎은 세개의 성모상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한국은 6·25의 심한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공산침략의 위협 속에 있을 때라 만상(萬想)이 오가는 미사 성제. 한창 거양성체(擧揚聖體)의 대목이 엄수되는데 뒤에서 복사하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는 여인이 있지 않는가.
손에 묵주하며 성물들을 한 묶음 내밀며 성모상에 문질러 달라는 것이다. 그제사 성모상을 다시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의 발에다 묵주를 문질렀던지 성모님의 발톱은 빠져달아나고 그 아름다운 발이 왼통 망그러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나는 단호히 거절할 태세를 취하는데 미사를 드리시던 李 신부님은 문질러 주라는 눈치다. 한 노파는 자기 묵주를 갖다대기만 했다고 툴툴하며 다시 고루고루 잘 문질러 달라는 것이다. 20세기는 성모님의 발톱을 갉아먹으며 간신히 유지하는 것 같다. (계속)
金達湖(本社 論性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