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①「도마의 信仰(신앙)」의 苦惱(고뇌)를 理解(이해)
한국사회 最大(최대)의 不幸(불행)「信仰(신앙)」 토대 없는 近代化(근대화)에 있어
발행일1968-03-17 [제610호, 4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宗敎的인 雰圍氣속에서 자랐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는 그분 나름으로 독실한 佛敎의 信者였었다. 새벽이면 의례 念珠를 돌리시며 不輕을 하시곤 하셨다.
촛불을 밝혀놓고 단정히 앉아서 눈 한번 까딱 않으시고 念珠를 돌리시며 讀經하시는 모습을 어찌 다 새벽잠을 깬 내가 대할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어떤 犯할 수 없는 威嚴을 느끼곤 하였다. 나는 할머니가 뭐 때문에 그러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 요즘도 이따금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 어린 나에게 깊은 印象을 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幼稚園을 나는 濠洲의 宣敎師가 經營하는 「미숀」 系統에 다녔다. 그래서 집이 좀 넓다는 이유로 내 집에서 園兒들과 그 母姉들이 모여 이따금 祈禱會 같은 것을 가지기도 하였다. 내집에 1年이면 열 달은 묵고 있던 針母할머니가 또한 독실한 基督敎信者여서 이분에게 이끌려 거의 每週日 敎會에 가서 祈禱를 들이기도 하고 讚頌歌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어떤 情緖的인(宗敎的 그것과는 다른) 好奇心을 나에게 채워주었을 것으로는 생각되나 그 以上의 影響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때때로 이 두 할머니를 생각할 때 나는 아주 對照的 映像이 떠오르곤 한다. 한쪽은 아주 의연하고도 단호한 態度이고, 한쪽은 어딘가 누구에 依支하고 싶은 몸짓의 弱하고 외로운 모습이다. 이러한 映像은 佛敎와 基督敎의 性格差라고 할 수는 물론 없고 두분 할머니의 處地나 健康이나 性格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어린시절의 宗敎的인 분위기는 나에게 뿌리를 박지 못했고 나는 宗敎와는 無關한 生活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宗敬가 꼭 必要한가 어쩐가를 내 自身에게 물어볼 겨를도 없이 아주 안일하게 또는 아주 경박하게 50에 가까운 人生을 살아온 듯하다. 그동안 어떤 知的 好奇心에 이끌려 佛經이나 聖書외 여기 저기를 기웃거린 일은 있었다고 생각된다. 信仰人의 눈에는 타樂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로마의 信仰」이란 것을 생각한다. 一切의 기적을 믿을 수 없었던 「도마」의 고뇌를 나는 理解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마」의 고뇌가- 그 規模에 있어 「로마」 보다는 限없이 적고, 그 심각성에 있어 또한 限없 이 옅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의 고뇌가 아닐까하고 나는 이따금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만큼 나도 宗敎的이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종종 人生의 쓸쓸함을 피부로 느끼곤 한다. 充足되지 않는 生의 空虛感-좀 과장된 감이 있긴 하나-같은 것을 느끼는 때도 있다. 그런 느낌들을 나는 詩를 씀으로 自慰하기도 한다. 물론 詩로서도 안되는 것이 있지만 되도록 그러한 느낌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지 않을려는 努力을 한다. 잊을려는 것이다. 더러는 잊혀지기도 한다.
나는 참으로 爲人이 어중간한 모양이다. 이것을 나는 意識한다. 이 意識이 나를 또 괴롭힌다. 이리하여 나는 이 意識을 또 죽일려고 한다. 나는 意識을 끝내 떠날 수가 없는 것인지?
信仰(宗敎)이 그 個人만이 아니라 國家民族을 살리는 偉大한 힘이라는 것을 나는 認定한다. 韓國社會의 最大의 不幸은 信仰(宗敎)의 힘을 깊이 認識못한채로 近代化라는 口號아래 자꾸 機能化로만 달리고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 個人으로서는 아직 아무런 信仰도 못 가지고 있다. 쓸쓸하고도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