受難(수난)의 폴란드 民族(민족) 自由(자유) 爭取(쟁취)에 몸부림
20年(년) 共産(공산) 抑壓(억압)에 抗拒(항거)
2百年間(백년간) 다섯번 「國土(국토) 조각의 被迫民(피박민)
敎會(교회) 언제나 旗手(기수) 把手(파수)꾼
大學生(대학생)앞장·知識人(지식인)들 呼應(호응)
動機(동기) 소련批判劇(비판극) 公演(공연) 中止(중지)
大學生(대학생) 70% 信仰生活(신앙생활) 한다고
「폴란드」의 대학생들은 다시 데모하고 있다. 「타임」지에 의하면 「바르샤바」의 어떤 극장에서 몇주일간 계속 공연한 「DZIADY」(조상들)이란 연극을 정부가 갑작스레 공연을 금지함으로 10년만에 데모가 재발한 것이다.
구경하는 관객들이 너무도 큰 소리로 비웃었고 노골적인 對英抗爭기미까지 비친 모양이다. 이 작품은 19세기의 폴란드 시인 아담·미키에비츠가 1832년 발표한 것이다.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부가 이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러시아를 비판하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시민들이 무엇을 느꼈는지 공산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정부는 연극의 내용보다 시민들의 생각을 억눌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폴란드 시민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억압할 수 없을 것이다.
「조상들」을 금지하고 부터 대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뿐아니라 지성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태도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산주의 정부는 거와 같이 지금도 지성인들과 데모하는 대학생들 중에서 주동자를 잡아서 감옥에 넣을 것이다. 폴란드가 러시아의 위성국으로서 언제나 이렇게 할 것이다.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러시아의 뒷받침이로 폴란드 민족을 억압한다. 폴란드 정부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끊어버린다면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오래 정권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위성국으로서 존재하며 러시아와 관계를 계속하는 폴란드의 정부는 시민들의 신망을 언젠가는 민들의 상실할 것이다. 폴란드민족의 깊은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의 현재의 「딜렘마」가 되었다. 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두가지이다. 폴란드가 가톨릭 민족이란 것과 민족으로서의 독립심이다.
100년 전만해도 교회는 자유를 위해서 고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러시아는 폴란드영토의 81%를 탈취하였다.(1795~1916년)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때 신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데모뿐아니라 혁명도 해봤다. 신부들 중에 약 400명, 그리고 「바르샤바」의 대주교 페런스키와 빌나와 다른 여러 교구의 주교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때도 오늘날과 같이 신자와 지성인들이 독립과 자유의 선구자들이였다.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들이 그 시대에 속한다. 제일 이름 있는 시인은 「祖上들」을 쓴 미키에비츠 1798~1855년)이다. 이 작품의 주「테마」는 나라의 자유와 민족의 전통을 주창한 것으로 『러시아와 관계를 끊어서 독립적 폴란드를 세우자』고 한 연극이다. 시인들이 작품을 통해서 국민들의 정신을 굳세게 하듯이 주교와 신부들도 종교자유의 입장에서 민족의 자유를 얻기 위해 죽음으로써 민족을 지도하였다.
17세기에 러시아와 터키와 스웨덴 군대들이 동시에 폴란드에 침입했을때 교회가 국민들을 모아 방어전을 하였다. 폴란드의 유명한 성모성당은 「체스도코바」에 있는 「야스나고라」의 대성당인데 1655년 바로 이 성당과 수도원을 지킴으로써 가장 큰 방어전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폴란드 민족의 역사와 폴란드 교회의 역사를 분리시킬 수 없다. 폴란드의 첫째 임금 미에츠코 1세가 966년에 영세를 함으로써 이 민족은 가톨릭 민족이 되었으며 20세기 오늘까지 가톨릭적 민족인 것이다. 현대의 3천만 국민들 중 2천7백만명이 가톨릭 신자들이다. 주교들은 63명이며 신부들은 약1만2천명 신학생 4천명 수사 7천명 수녀 2만7천명이며 성당은 약1만1천이 된다. 그런데 폴란드 민족은 1918년 약130년만에 기다렸던 독립을 얻었으니 오랫동안 자유속에 살지 못하였다. 그러나 힛틀러가 러시아와 합세해서 1939년 전 폴란드를 점령 지구로써 러시아와 반씩 나누었다. 1939년 부 터 1945년까지 폴란드의 3백만명 유태인중 약2백만명이 힛틀러의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으며 폴란드의 지성인들 가운데도 수천명이 죽었다. 힛틀러의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폴란드 신부들은 2천명이다. 1945년 제2차대전이 끝났을때 폴란드는 완전히 파괴된 나라가 되었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이미(1943년)「얄타」에서 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스탈린에게 넘겨 러시아 군인들이 1944년 폴란드를 점령하였을때 폴란드민족은 일어날 힘이 없었다. 폴란드 동쪽지구가 러시아에 속하게 됐을때도 반대할 힘이 없었다. 또 러시아의 뒷받침으로써 폴란드에서 공산당을 세우고 공산주의에 의한 정부를 세우게 됐을때 국민들이 이에 항거한 힘이 없었다. 제2차 전쟁때 모든 힘을 이미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국민들은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비신스키 추기경의 지도를 따라(1949년부터) 신자들의 정신적 저항은 굳게 되어 공산주의자들과 종교자유를 얻기 위해서 싸우게 되었다. 교회는 계속해서 박해를 받으면서 싸우길 잊지 않았다. 비신스키 추기경과 다른 주교들 그리고 수많은 신부들이 1951년부터 공산주의자들의 감옥에서 소극적 저항을 계속하였다. 1956년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 데모하면서 비진스키 추기경의 자유를 구하였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교회와 공산주의 정부 사이의 싸움은 날로 더해졌다.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유정신을 대표하는 단체가 오직 가톨릭 교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 정부는 교회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폴란드 정부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의 뒷받침 없이는 독재 정치를 못하니까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써 자유를 국민들에게 주지 않았다. 정부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두텁게 할수록 정부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높아갔다.
그래서 요사이 대학생들과 지성인들이 데모하는 것은 자유를 위한 혁명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바르샤바」대학생들 가운데 종교에 대해서 「앙께뜨」하였는데 대학생들 중에 70%의 학생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회답했다. 폴란드 민족이 가톨리시즘으로 공산주의를 타도하려는 노력을 다시한번 온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徐基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