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④
미사, 典禮(전례)의 全部(전부)아니다
聖事(성사)에 置重(치중)「말씀」等(등) 閉視(폐시) 라띤語(어) 使用(사용) 고집도 不當(부당)
典禮(전례)와 하느님의 말씀
①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불교예식과 가톨릭예식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가끔 어떤 신부가 미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전혀 구별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에게 전혀 결여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불교승은 예식에 있어 완전히 어떤 신성(神性)에게로 마음을 집중하여 기도함으로써 신의 현존을 느낄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백성이나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한 전달사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백성에게 등을 댄다. 이와 반대로 가톨릭 사제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서를 읽고 또한 설교해야 한다. 그래서 백성을 향하여 자기얼굴을 돌린다.
절에 가는 모든 방문자는 곧 이 차이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②어떤 책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푸로테스탄트 제교회는 말씀의 교회라 할 수 있고 동방정교는 성사적인 교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가톨릭은 말씀과 성사의 교회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별은 아주 걸맞지는 않다. 다만 여러 교회가 어느 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가를 지적했을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 도 가톨릭교회는 자체의 본질적 요소를 거스려 두 가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로 8세기부터 죽어 없어진 언어로 전례를 거행해 온 것이고 둘째로 루터 이후로는 성사적 일면만에 치우쳐 중점을 두고 말씀」은 등한히 한 것이다. 첫째 오류를 변호할려고 대체로 두 가지 이유를 드는데- ①라띤어는 식자(識者)들의 용어이므로 이를 통해 전례는 고상하고 신비스러운감을 갖게 되며 뿐만 아니라 ②라띤어는 일지의 표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다, 우수광스러운 것이다. 전례는 박학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신비스러운 느낌은 신앙의 신비자체에서 일깨워져야 할 것이지 괴상한 외국어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도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국어를 통해 시도했고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한문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도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알아야하고 또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런 계시를 라띤어나 한문으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죄악이다. 만일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신비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신비는 어떤 어려운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면 언어를 알아들어야 된다. 또 라띤어가 가톨릭신자의 일치의 표지라는 것도 옳지 않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교회의 일치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셨던가? 『몸도 하나요, 영도하나입니다. 그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의 그 부르심에 따르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세도 하나입니다.』(에페소 4·4~5) 성 바오로께서는 역시 어떤 언어(라띤어)나 어떤 예식(로마적)이나 또 어떤 제복의 모양이나 어떤 음악(그레고리안)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다. 성 바오로께서는 일치를 본질적인 면에서 보시지만 교회에서는 너무나 외적면에서 찾을 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지나치게 표면적이고 원시적인 태도가 아닐가?
둘째 오류는 이미 말한바와 같이 성사적인 면에 너무 중점을 둔 것이다. 루터와 특히 다른 이단자들이 성사를 의심하고 모든 종교적 힘을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두었다. 교회의 이에 대한 반발은 일면적이고 근시안적이었다. 따라서 성사를 강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게 되었다. 특히 미사의 의의를 소위 VEQMFSSUNG(미사화 혹은 미사주의)라 할 만큼 그렇게 지나치게 과장했다. 이는 바로 미사만이 완전한 힘을 가진 것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완전치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행사나 집회 등은 반드시 미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미사가 없으면 아무런 완전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례의 다른 모든 형태는 등한히 되었다.
③이 두 오류는 이제 공의회를 통해서 다시 시정되었다. 미사중에 하느님의 말씀은 다시금 그 자체의 가치를 다시 찾아 얻었다. 모든 사제는 이제 천천히 명확히 그리고 근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형식의 말씀의 전례를 만들었다. 이 말씀의 전례는 현재로서는 신부가 없는 공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본당 자체에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말씀의 전례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제는 신자들에게 더욱 많이 성서를 알게 할 수 있고 미사에 참례치 못했던 신자들에게도 성서의 일부를 읽어주고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미사에 나오는 성서 구절은 가끔 아주 간단하게 임의로 발췌된 것이기 때문에 충분하지 못하다. 성서의 아주 좋은 구절도 미사 중에는 전혀 읽혀지지 않는 수가 있다. 말씀의 전례의 「텍스트」는 사제자신이 만들거나 분도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사경본에 있는 「찬미경」이나 「종파경」을 그러한 용도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아직껏 여기에 대한 특별한 지시가 없기 때문에 신부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④공의회가 우리전례에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금 본연의 가치와 중요성을 되찾게 했다면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더욱 잘 알고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를 더욱 잘 알게 된다면 우리는 또한 장차 기독교신자들의 재일치의 길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성서만이 우리가 갈라져간 교회들과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우리는 대전에서 교회와 성공회사에 이루어진 결정을 대단한 감사의 정으로 읽어보았다. 거기에서 말하기를- 『말씀의 전례를 양측 신부가 공동 집전할 수 있다』-(제4항)고 했다. 신부들이 이런 좋은 일을 자주이행하기를 바라며 이와 같은 결정- 다른 교회들과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계속)
白 쁠라치도(神博·왜관보좌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