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교구장 파 주교는 9일 제70회 탄신일을 맞이하였다. 사제로 서품 된지 38년, 주교로 성성 된지 10년이 된 파 주교는 이날 주교관에서도 토요일인 관계로 지방 신부들을 초대하지 못하고 시내의 신부와 수사들을 초대하여 12시에 조용한 피로연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파주교는 다음과 같이 감회를 말했다.
『70년이 어느듯 꿈같이 지나갔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이제는 나이도 많고 하였으니 금년에는 교구장직을 사임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사직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교황대사 및 「메리놀」 총장과 상의 후 결정키로 했다. 이러한 사임에 대한 결의는 작년부터였으며 「메리놀」 총장신부에게는 작년 가을 서신으로 사임의사를 밝히고 이번 여름 도미시에 접견하여 상의키로 했다한다. 파 주교는 교구장직을 사임하더라도 한국민을 위해 죽을때까지 봉사할 것을 다짐했다.
사임후의 몇가지 사업안을 밝히는 자리에서 파 주교는 양로사업과 나환자 구호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청주시에다 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세울 것을 발표했다. 양로사업은 왜정때 평북 의주본당주임으로 있으면서 경영한 바 있고, 해방 후에는 충북 옥천에서 양로원을 설립하여 현재에도 40여명의 무의 무탁한 노인들이 수용되어 혜택을 받고 있다.
또한 나환자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마산 포로수용소 근무당시에는 인근 나환자들을 가끔 심방하여 위로와 격려를 하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며 현재에도 많은 나환자들에게 보호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파 주교는 사임전에 우선적으로 벌일 사업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중학교 설립을 위하여 금년중 교사를 청주에 신축하며 이를 위한 대체적 예산확보는 되어 있다.
②미원 본당에 수녀원을 설립하고
③청주시내에 난민을 위한 주택을 설치 할 목적으로 사직동에 약3천평의 부지를 구입하였고
④숙원인 청주지구의 교회묘지를 금년내에 설치 할 계획이라 한다.
이 밖에 할 일은 많지만 이상의 것은 사임전에 반드시 완수할 결심이라고 거듭 다짐한다.
파 주교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898년 3월 9일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출생.
1930년에 사제로 서품, 2년간 「메리놀」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2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어 평북 비현 보좌신부를 거쳐
1933년 평북 의주본당신부 2차 세계대전시에는 의주에서 일경에 피체·7개월간의 영어생활을 했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미 육군 군종신부로 「유럽」에서 활약했다.
1950년 6·25사변시 한국전선의 군종신부로 참가하여 거제도와 마산에서 활약.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자유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1953년 휴전이후에는 충북 감목대리로 근무 중 1956년에는 「메리놀」회 부총장에 피임되어 미국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8년 청주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설립되면서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동년 7월 16일에 주교로 성성 11월에 정식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 부임했을때는 도내 5개 본당에 신자수는 약8천명 정도였으나 현재는 25개 본당에 5만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는 교구로 발전되었다. 또한 교구내에 「빈첸시오·아·바오로」회를 설립하여 도내 난민과 극빈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아직 중요한 사무처리는 자력 으로 할 만큼 노익장주교님이시다.
청주서 宋昌吉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