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質宗敎(이질종교)로서 摸索(모색)되는 하나의 세계 예수와 공자와 석가와 (完)
모든 宗敎(종교)의 歸着點(귀착점) 「인간사랑」
無知(무지)의 克服(극복) 「無(무)」의 심오한 理致(이치) 등 깨우쳐
眞理自體(진리자체)인 예수, 人間救援(인간구원)을 實踐(실천)
<承前> 그러나 이 3者간에는 얼마나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쏘크라테스에게는 삶이란 다름아닌 앎이었다. 앎은 그에게 있어서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종교인 것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무지요, 그러기에 『저 자신을 아는 것』이 인간 구원의 진리인 것이다
그는 그래서 일생동안 물어 보았다. 희랍을 지혜의 생터라 하는 것은 바로 쏘크라테스를 두고 한 말일지 모른다. 물어보는 것은 무지르 극복하는 삶의 투쟁이요 이 투쟁은 자기 존재와 자기행동을 영원한 진리와 조화시키기 위한 투쟁이다. 쏘크라테스는 여기에 성공한 것이다.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자기 제자들에게 영원과의 조화는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죽음으로써 이를 증명하려고 자기의 모범을 따르라고 외치면서 태연히 죽어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하여 철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라』고 설파한 그는 불투명한 인생행로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人子」란 신성한 호칭으로 자기 자신을 부른 그는 우리의 兄弟라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체임을 재확인하고 인류구원의 大業을 오나수하였음을 告한다. 그러기에 그는 現世의 삶과 永遠한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하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자기자신을 「깨달은 자」라고 호칭하였고 그가 깨달은 진리는 「속임의 법칙」이었다. 삶이란 언제나 어디서나 덧없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 그의 제자들은 그를 두러싸고 친근하게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희후의 명상 끝에 생존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라고. 석가의 죽음은 삶에 대한 커다란 깨우침이요, 삶은 고통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욕이 있음은 이것이 인생이요 생욕을 버림은 인간 구제의 길이다. 석가의 죽음으로써 없음의 심오한 이치가 깨달아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석가 마냥 생고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로 최후의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의 최고 관심사는 사람이 영원히 멸망하느냐 사느냐에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뿐이었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써 자기의 사명 완수라 생각하였다. 인간구제의 방법으로는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 사랑이 이렇듯이 컷기에 목숨을 바쳐 희생물이 된 것이다. 그는 실천하였을 뿐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는 하느님으로서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고, 위로부터 파견된 구세주일 망정 사람으로서 부처가 된 인간 聖者는 아니다.
이렇듯 다른 佛敎 儒敎 基督敎는 과연 共同의 廣場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스도敎는 하느님을 사랑으로 規定하는데 本質이 있고 佛敎는 부처님을 慈悲로 보는데 그 核心理想이 있고 儒敎는 仁을 中心理想으로 삼는다면 三宗敎는 서로 대화할 수 있는 共同廣場은 마련되엇다고 본다. 사랑은 두 人格 사이에 서로 이끄는 힘으로서 서로를 위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慈悲는 일반적으로는 同情과 통하는 말로서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 하겠다.
그러나 佛敎의 慈悲는 한층 더 높은 次元의 것으로 부처님의 大慈大悲는 直接的인 自己滿足을 앞질러 끊임없이 生苦에서 解脫하는 方法을 가르치는데 있다. 苦痛의 原因이 되는 生慾에 다같이 通하는 마음이다. 儒敎의 仁도 그리스도敎의 사랑이나 佛敎의 慈悲와 결국은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漢文의 풀이를 보면 仁은 二字와 人의 合字로 사람과 사람이 相親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友, 相親의 뜻이다. 사랑의 라틴어 AMOR은 아마 AMICUS(友)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東洋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서로 안부를 묻고 인사할 때에 「사람」임을 자각한다. 아마 「사람」이라는 말은 「사랑」 「삶」이란 말과 같은 어간에 속하지 않나 싶다. 現代 神學 思想은 人間을 『세상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존재로 규정한다. 예로부터 東洋에서는 對人關係와 社會를 벗어나서 人間을 規定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東洋의 倫理는 君臣, 父子, 夫婦의 三大 人間關係와 朋友, 長幼의 관계를 人間의 五大關係라 하여 그 자체가 人倫綱常을 이루는 五倫이 된다.
그러므로 天道의 表現이요, 人道의 實踐인 人道는 孔子의 제자 焚_가 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스승의 해답은 「愛人」이었고 따라서 人間의 至上命令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敎의 大憲法이라고 할 수 있는 十계명을 요약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한 精神과 一致한다.
제2차 「바티깐」 公議會는 人間槪念을 個性에서 잡지않고 人類共同團體라는 巨大한 槪念 테두리에서 잡는 것으로 볼 때 異質的이기는 하나 모든 종교가 人間을 사랑이라는 데서 公約數를 찾는다면 죽어서 天堂에 가는 길과 「니르바나」에 드는 길이 다를지 모르나 『사람을 사랑하면서 삶을 찾는데는』 서로가 같은 길로 손 잡고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끝)
白민관(가톨릭大學敎授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