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우리 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모든 영성을 비판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복음의 내용을 다음의 두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하여 보았다. 첫째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둘째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첫째 주장에서 볼 때 복음은 그 자체가 체계적인 것이 아니며 특히 철학이나 윤리학이 아닌 천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훌륭한 업적에 대한 기쁜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심은 천주님의 선물들을 선포함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어야 하며 인간의 노력을 치중하는 사상 엄격한 법률을 강조하는 사상 여러가지 절차를 권하는 사상은 복음의 내용에 맞지 않는 것이다.
둘째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적 신심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어떤 성인은 (예 · 성 프란치스꼬 CHARLES DE FOUCAULD) 될 수 있는대로 외적으로도 목수이자 전교사이었던 예수를 따라갈려고 했으나, 여기에서 뜻하는 모방은 사도 성 바오로께서도 「필립피서」 2장 5-11절(성지주일 서간 참조)에 가장 똑똑하게 말씀하신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었다. 그리스도의 스스로 낮추심과 영광에 관한 이 귀절은 성주간 전례의 「모또」가 되며 모든 그리스도교 신심의 개요와 총괄이 된다고 하겠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보면 성부께 대한 완전한 순응과 형제 인간에 대한 총애일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었던 그리스도 자신이 신심의 모범과 기준이라고 했다고 해서 교회안의 모든 신심이 획일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교회안의 신심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인간이 아니라 부활하여 항상 교회와 같이 계심으로 그리스도 친히 교회안에 모든 신심을 지도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게서는 성신의 특은을 어떤 분들에게 주시어 새로운 신심을 일으켜 주시니 같은 복음을 기준으로 한 신심은 다양성을 띠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충만을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도로 그것을 받아들이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여러가지 양식으로 받을 수 있는 것과 교회의 신심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 수 없는 것을 복음서 자체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4복음 중에 어느것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운지 우리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중 한가지 가르침만을 골라서 기준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단자들의 잘못이었다.
우리의 교회안에서도 온갖 신심이 있으나 이것은 신약의 기쁜 소식 중에 일단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복음 전체를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교회안에 재속신부와 수도자 평신도와 성직자 그리고 각 수도회의 신심이 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그중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 보다 복음에 더 가깝다. 우리는 아루미 현대에 알맞는 신심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라도 이론적으로 어떤 신심을 만들지 말고 복음의 내용인 그리스도 자신을 보고 따라야 할 것이다. 언제든지 그리스도께 제일 가까운 사람이 자기 시대의 교회에 제일 유익하다. 그래서 성 분도도 그렇게 했지만 성 프란치스꼬는 13세기에 신빈(神貧)이 특ㅂ려히 아쉽다고 해서 가난의 신심을 계획적으로 닦아 보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한 그리스도의 빛나는 가난만을 생각하여 생활하고 그것을 사랑하였다.
이러한 예를 보아서 우리는 복음과 현대 사상과의 타협이 되는 신심을 만들어 보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데이랴으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IN) 신부의 학설을 너무 옹호하는 자들은 어떤 때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많은 유태인들이 『모질다. 이 말이여! 누 참아 들으리오…』라고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면 좋을 것이다.
마음 좋은 사람에겐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지만 십자가는 자연히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악표가 되기 쉽다. 현대인의 귀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고 그의 신심을 닦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지만 이것보다 먼저 명심하여야 하는 것은 천주께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주신 규범이다.
성 요한과 성 바오로의 가르침에 의하면 복음이 세속을 판단하는 기준임으로 교회에 유익한 것은 복음과 세속(요한 복음이 말한 뜻) 사상의 절충이 아니다. 그리고 복음적 신심이 결국 세상에도 가장 유익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성신 강림 이부 서간 참조)
晉 도마스 神父(聖베네딕도會員 · 왜관대수도원 수련장 · 哲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