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의 메시지
니체는 이 불길한 짧은 우화(우話)를 통하여 당대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던가? 니체는 이 비유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제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신이 죽었다는 것만은 하나의 사실이란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실상 어떤 방법으로나 이미 신을 믿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들은 주일날이면 교회에서 입술로만 신을 섬기고 평일엔 마치 신이 없는 거나 다름없이 처신하며 사업이나 학문·정치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의(故意)가 없었으나 실제로는 신을 죽여 버렸다. 그것은 아마 고의에 의한 살신(殺神)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발적인 살신(殺神) 사건이었다.
니체의 눈엔 이 살신행위가 도시 큰 죄악이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매우 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이 흡혈귀(吸血鬼)같은 신은 현세를 위하여 살려는 인간의 강한 의지(意志)를 빨아들여 송두리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은 죽어야 마땅했다.
진정한 비극은 현대인이 아직도 그들의 죄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데 있었다. 그들은 옛날의 신은 죽고 이젠 그를 대신할 이가 천상에나 지상에 도무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치명적인 오(過誤)로 인하여 인간은 무서운 결과를 견뎌야 했다.
19세기 낙천주의(樂天主義)의 절정기에 니체는 홀로 미구에 서구사회로 휘몰아친 폭풍을 예언하였다. 양차 세계대전은 구문화(舊文化)의 구조(構造)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실로 죽어버렸고, 신의 죽음은 또한 기독교 세계의 사멸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잿덤이 속에서 그리스도교 이후 시대가 대두(擡頭)하였다. 20세기의 특징은 사람들이 니체를 결국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인간은 신을 대신할 그 무엇을 찾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만으로는 이미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리하여 무신론자들의 새로운 부류는 신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수세(守勢)에 몰린 약한 무신론이 아니라 적극적이고도 도전적(桃戰的)인 반유신론(反有神論)을 목격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신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을 위하여 신은 죽어야할 따름이다.
■ 오늘의 無神論
오늘날 가장 도전적인 반유신론(反有神論)의 두가지 형태는 맑스의 공산주의와 실존주의(實存主義)에 있어서의 무신론적 경향이다.(후자는 추상적 원리에서 출발한다기 보다 인간 스스로를 발견하는 입장에서 출발하는 하나의 생활방법이다.) 맑스주의자들의 사상은 널리 보급되었다. 1844년 칼·맑스가 『인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를 폐지해야 한다』라고 서술했을 때에, 그는 당대의 많은 이가 이미 실제로 깨닫고 있던 불안을 강조했을 뿐이었다.
즉 형식적인 종교는 모든 이가 제각기 천국에서 응분의 보응을 받는다고 하면서 무산대중(無産大衆)은 인종(忍從)하고 소수의 유산자(有産者)는 자선(慈善)하기를 권고하는 섭리(攝理)의 신을 망상(妄想)함으로써 불의(不義)로 가득찬 기괴한 사회제도를 교사(敎唆)하여 영구화시켰다.
공산주의는 「휴매니티」의 이름아래 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1세기 이상이나 세계적인 개혁운동을 전개시켜 놀라운 성과를 거두워 왔다.세상을 초월한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인간자신을 믿는 신앙을 말살하고, 아울러 현세에서 자신을 해방하려는 인간의 의지(意志)를 빼앗아 버린다. 이 세상은 오늘과 내일에 창조될 인간의 유일한 낙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무신론은 아니다. -아마 공산주의자 역시 적어도 그 무엇인가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와 인류의 미래를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에는 한층 황량(荒량) 한 불신(不信)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불신은 어떤 정치제도와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도처에서 진지한 사상가들과 함께 많은 이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장·뽈·사르뜨르와 같은 실존주의자에 의하여 제창된 무신론적 「휴매니즘」 따위가 그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