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로서 부산교구 설정 및 초대교구장 최재선(요한) 주교님 성성 제10주년을 맞이하게 됐다.
부산교구에서는 이날을 경축하고 또 병인순교 백주년을 기념하는 각가지 행사가 5월 28일 성체대회를 위시하여 체육대회 웅변대회 전시회 등 다채롭게 거행될 계획이다.
지난 2월에 발표한 교구설정 10주년을 맞이하는 최주교님 교서를 통하여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교구의 안팎에서 10년간의 크고 적은 풍랑은 모질고 세찼으나 실로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여기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신자증가 6만7천명을 위시한 그중 특히 눈에띄는 몇가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첫째 작년 1966년 5월 30일부로 불과 교구창설 9년만에 마산교구를 독립시켰고 마산시 등 5개 시와 13개 군에 20개처의 본당과 22명의 신부와 신자 2만8천2백여명을 떼어서 마산교구를 신설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구 설정 당시에 비하여 놀랍게 발전한 교세다. (마산을 포함) 교우수가 3만5천에서 10만2천여명(66년도까지 통계)으로 늘었고 성직자가 44명서 71명으로, 수도자가 133명에서 367명으로, 신학생수가 39명에서 159명으로, 본당 수가 27에서 온천, 괴정, 초장, 김해, 서면, 송도, 대연, 남해, 칠암(진주, 수정, 구포, 중국인(초량), 삼랑진, 해운대, 동대신동, 합천, 의령, 산청, 월남(마산), 하동, 물금 순으로 24개 본당이 신설되어 51개로 늘었고 그중에서도 20개처는 현대식 건물로 신축 또는 증축함으로써 최 주교님 사목목표인 1군 1본당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셋째로 사회사업의 발전상이다. 데레사 · 대양 · 성지 · 해성중고교를 모두 신축 혹은 증축, 훌륭한 학교로 발전시켰고 그밖에도 성모여자중고등학교를 부산에 유치시켜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로 하여금 설립케 했으며 그외도 타교구 혹은 일반교육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하여 교육사업에 이바지 한 것이다. 그리고 6개의 고아원 · 양로원 · 산성농장 · 특히 한국자선회는 부산교구의 경제적 기반을 닦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최 주교님이 부임이듬해 교구운영에 어려움을 겪고있을 때 장병화 부주교님의 소개로 「루벤」 대학의 동창인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부산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그후 소 신부가 몸이 불편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자 최 주교님은 미국에 가서 원조를 청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라고 당부했다. 그후 1961년 4월에 최 죽님께서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소 신부와 합세하여 「뻐스」 혹은 보행으로 묵주알만을 굴리며 6개월동안 각 지방을 다니면서 여고나에 들 돈마저 아끼셨던 피눈물나는 고생이 보람을 맺어 미국에 조그마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몇사람의 은인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도 미국 스펠만 추기경의 경고와 「로마」로부터 사업중지 통고를 받았다. 그후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 주교님과 소 신부는 직접 「로마」에 가서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에게 수차에 걸쳐 호소하여 묵인을 받아 인내와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은 다시 활기를 띠게되어 1964년에 한국으로 사무실을 옮겼던 것이다.
1966년 11월말까지 이 사업으로 1백42만6천6백41「달라」(한화 3억8천4백19만3천원)나 되는 막대한 외화수입을 모아 정부 우편 요금에만도 49만3천9백32「달라」를 지불했고 인건비, 운영비에 35만 「달라」 자선사업비에 34만 「달라」 교회사업비에 15만 「달라」를 썼으며 특히 그동안 수십만명이나 되는 여성들의 직업보도에 기여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그 성과는 놀랄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업으로 인해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을 비롯하여 기관으로부터 50여개의 표창과 감사장을 받은 사실이 있다.
그밖에도 주교관 건물을 확보한 것과 「꼰벤뚜알」 성프란치스코회(대연 일광 나환자 정착사업) 성프란치스코 수도회(진주 산청 구라사업) 예수성심전교수녀회(초량 육영사업) 메리놀회(부산 병원) 성분도회(초량 병원) 성프란치스코수녀회(양정 성모학교 병원) 등 외방전교 수도단체를 유치시켰고 「샬뜨르」 성바오로회(학교 · 병원) 치명복자수녀회(청학) 마리아수녀회 등 많은 수도단체를 선교활동에 공헌케 했다.
넷째로 대외적으로는 부산은 물론 경남일대에 천주교회에 대한 일반 인식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최 주교님은 사회사업을 통하여 또는 개인적으로, 각 기관장들과 유지들과 남몰래 친분이 두텁고 존경을 받고 있으며 주교님께서는 대외적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부산교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교구내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열성과 사도직 실천과 상호협조 결실이라 하겠으나 최 주교님 외도 숨은 공로자(명단과 세목은 생략함)들이 많을줄 믿는다.
그러나 남달리 성모 공경에 열심하고 검소한 최 주교님의 인품이 오늘의 부산교구를 성장케 한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주교님이 언젠가 『내가 부산에 처음 부임차 부산역에 나릴 때 가저곤 것은 이 묵주 하나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듯이 황무지를 개척한 것이다.
『기구하여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사목표어를 내걸고 『나는 지식과 능력과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길은 이 묵주가 손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안될 것이 없읍니다.』라고 하며 기구하고 일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굳은 신념으로 성직자 수도자와 모든 신자가 혼연일치가 되어 「로사리오」를 열심히 바쳤던 것이다.
10주년 교서에 전교우들에게 6백만번 묵주신공 운동을 호소했으며 「로사리오」의 성모를 부산교구 수호자로 모시고 세상 끝까지 효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부산교구의 사목방침과 목표를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마산교구를 분리하고 부산시와 7개 군이 남았지만 1군 1본당의 목표는 이미 돌파했으니 나아가서 1면1본당을 실현하여 부산교구 전시민이 신자가 되도록 하여 또 하나의 교구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동대신동, 영주동, 남부민동3가, 가야동, 전포동 2개소, 문현동, 연지동, 범일동, 봉래동3가, 동삼동, 초량(신축중) 감만동, 동래장안면, 창령군 남지면, 양산군 양산면 등 16개처에 훌륭한 성당터를 확보하고 하나씩 건축을 시작할 계획이다. 또한 부산교구에서는 사목이 원동력인 사제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그밖에도 「센타」 건립과 각 수도단체의 유치 그리고 사회사업의 확장에 대한 청사진이 설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이니 이스라엘의 기적이니 하는 말이 유행되어 모든 부흥상에 꿈을 부풀게 하는데 사용하고 있듯이 『우리교구 발전이 기적만 못한 것이 아니다』라는 최 주교님 말씀대로 불과 10년동안 부산교구의 발전상은 실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