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璧한 人生드라마의 演出
인류 역사상 그리스도와 재간을 겨룰만한 연출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지구상(地球上)의 인류 가운데에서 그의 위대한 인생 「드라마」의 연속적인 장면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놀랍고도 완전한 무대를 설정하였다. 즉 예수는 「베틀레헴」 동굴의 깜찍하게 재미있는 배경에서부터 「아리마테아」의 무시무시한 무덤에 이르기까지 의미심장하고도 극적인 감명을 주는 장면으로 그의 사명을 끊임없이 수행했다. 그는 성난 바다물위로 걸어갔고 한소년의 야외도시락으로 5천명을 먹였으며,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수만명이 그를 환호했고 수만명이 그를 믿었다.
■ 觀客없는 마지막 舞臺 언저리
그러나 그의 위대한 지상(地上)과업의 마지막 장면을 위해 그가 선택한 돌막(石幕)이 올랐을때 관객은 한사람도 없었다! 오직 천사들만이 신성한 그의 부활장면을 지켜보았다.
한국 속담에 「수박 겉핥기」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이 예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제자들의 마음상태를 잘 설명한 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 예수가 약속한 바를 피상적으로 믿었을지 모르지만, 예수의 활동방법, 즉 신적(神的)인 방법은 믿지 않았다. 성 루까의 말처럼 『그들의 눈은 어리어 있었다』(24·16) 그들은 예수가 세력있고 복수심에 불타는 군왕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가 어리석게 칼로 잘라버린 사람의 귀를 예수가 치료해 줄때 극적으로 증명된 「비 폭력정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가, 겸손한 그리스도는 부활한 후 소박한 동산직이의 모습으로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났고… 베드로에게는 「엠마우」로 가는 여행객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후 승리자인 그리스도는 조그마한 해변에서 사도들을 위한 조반상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한마리의 사자가 아니라 한마리의 양(羊)과 같이 공연하는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를 감상할 수 없었다.
■ 수박 겉핥기로 答한 人間
오늘날 수백만명 중에서 신앙의 선물을 받도록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은 소수의 우리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역시 「수박 겉핥기」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약속을 피상적으로만 믿는가? 만일 우리가 가끔 그렇게 믿을 경우에는 하느님이 가장 위대한 두가지 기적을 인류에게 알려줄 수단으로 인류역사에 이룩해 놓은 두가지 「사랑의 행위」를 깊 생각하도 하자. 마리아·막달레나와 성토마스의 애기가 바로 그것이다. ①마리아·막달레나로 하여금 『예수의 시체에 발라줄 향액을 가지고』(말구 16·1) 예수의 무덤으로 가도록 촉구한 것은 분명히 「사랑」의 행위였다. 만약 그녀가 예수의 시체에 향액을 발라주기 위해 무덤으로 가지 않았던들 그녀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한 사실을 어떻게 발견했겠는가? 무덤에 있던 천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살아계시는 이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는가?』라고(루까 24·5) ②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세상을 떠날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사도 성토마스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한번 마리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 위해』 마리아의 무덤으로 가게한 것도 역시 「사랑」의 행위였다. 만일 그가 마리아의 무덤으로 가보지 않았던들 사도들은 마리아의 시체가 무덤을 떠나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이 승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했겠는가?
■ 두 壯嚴한 사랑의 「드라마]
여기서 우리는 두개의 장엄한 사랑의 「드라마」가 둘다 묘지, 즉 우리들도 어쩔 수 없이 인생여로(旅路)의 종착점을 발견해야 할 바로 그 장소에서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얼마전 경기도 광주군에서 4백년동안 「잘 보존된」 한귀부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우리들의 기도는 그리스도가 선언하고 가르친 바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복된 부활을 위해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파멸을 면하여 『잘 보존된 채』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 그렇게 일반화되지 못한 것 같은 두가지 신앙, 즉 감실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앙교리를 재(再) 확대, 강조할 것을 제외한다.
■ 수박 속의 달콤한 「참맛」
우리는 우선 마리아·막달레나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과 기도의 향액」을 가지고 교회로 가자. 그리스도는 육신과 영혼을 갖춘 신이요, 인간이된 그처럼 놀라운 방법으로 인류 가운데 현존하는 위대한 「드라마」를 겸손되이 또한 신비스럽게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의 「향액」을 가지고 교회로 갈때 그리스도는 당신께 대한 우리의 온전하고 능동적인 신앙을 가로막는 피상(皮相)의 돌을 밖으로 굴러낼 것이며 수박 겁데기가 아니라 수박 속의 단물을 맛보게 할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한시간이나 혹은 몇분 동안의 신앙행위가 무거운 짐이 된다면 몇몇 친구나 가족의 힘을 빌려 함께 하도록 하자. 어서 성서를 펼쳐 그리스도의 위대한 「드라마」를 연구하자.
■ 두개의 生命과 죽음의 胎
그리고 교형들이여 성토마스 처럼 열열한 영혼으로 예수의 어머니를 사랑하자. 마리아 없이는 진정한 부활절이 없다. 그리스도는 「아리마테아」에서 땅의 태(胎)로 부터 생명을 되찾은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의 태(胎)로 부터 생명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나는』 성세성사를 받아야 한다. 이 사실은 먼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가슴속에 파묻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가? 황해의 성난 풍랑에서 구해준 마리아께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바침 참된 심신을 명심하고, 공동기도로 묵주신공을 바치자. 성주간 동안 우리는 『다위의 아들에게 호산나』하며 큰소리로 노래했다. 마리아에게 주어진 모든 아름다운 이름 가운데서도 특히 마리아는 「다위의 탑」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인생과 부활의 「드라마」 가운데 마리아의 탑으로서의 역할을 경시(輕視)하지 말자. 『공든 탑이 무너지랴』
車梅雨(대구갈멜修道院指導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