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① 一, 숨어계신 하느님
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敎會(교회)의 救世活動(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無神論 - 舊約(구약)부터 信仰(신앙)의 끝없는 鬪爭對象(투쟁대상) · 現代(현대), 새 次元(차원)의 社會問題(사회문제)로 취급
人間全存在(인간전존재)를 걸어 追求(추구)할 自明(자명)치 않는 神(신)
現代社會(현대사회)선 「懷疑(회의)」가 支配的(지배적) 與論(여론)돼
無神論(무신론)의 意味追求(의미추구)
司牧神學(사목신학)의 불가피한 課題(과제)
발행일1967-06-04 [제571호, 4면]
■ 譯者들의 말
젊은 知性들과의 對話할 態勢 갖춰야
本稿는 뵐레르 師가 국제가톨릭신학잡지 「CONCILIUM」(佛語版 通卷第23號 1967년 3월 P, 29-44)에 발표한 論說…SUR LATHEOLOGIE DE L'INCROYANCE, COMME HYPOTHESE DES MAXIMES DE L'ACTION SALVIFIQUE DE L'EGLISE의 全文을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無信仰과 無神論이 全世界에 만연되어 가는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이 論說의 背景은 역시 歐美 특히 西歐世界이다. 여기에 바로 이 論說의 특수성과 한계가 있다 하겠다.
無信仰의 神學, 이렇게 놓고보면 이 두 낱말은 서로 모순이 될 수 밖에 없다. 「離敎의 神學」을 운위하는 것부터가 하나의 逆說이라면 하물며 「無信仰의 神學」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神學을 일러 神에 관한 理論이요 敎說이라 할 수 있다면 무신앙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신앙의 「神學」이란 엄청나고 건방진 표현을 구사하는 것보다는 무신앙이란 사실이 어떤 신앙인 특히 교회안에서 살고있는 그리스도 교인에게 「意味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묻는 편이 훨씬 소박하고 사리에도 더 잘 맞을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대의 가장 중대한 사태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불란서의 철학자 쟝 라크르와(JEAN LACROIX)는 「現代 無神論의 意味」라는 테마를 철학적 관점에서 다룬바와 같이 (LE SENS DEL ATHEISME MODE CASTERMAN, 1951) 무신앙이란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司牧神學的 觀点에서 다우러볼 수 있겠고 또 그래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극히 정당하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학적 작업이라 해서 무방할 것이다.
중세때에는 信仰, 즉 믿는다는 사실이 『지극히 당연하고』 아무런 문제꺼리가 없는, 순조로운 일이었던 것 같다. 요즈음 우리는 『懷疑가 하나의 여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쥬리앙 그리인의 말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司牧神學이라 해서 무신앙을 하나의 뜻하지 않은 불행한 「事故」로 생각하고 이를 간단히 묵살해도 좋다는 법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무신앙은 교회의 사도활동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긴급하고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실상 이렇게 생각하고 또 마라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 않지만 흔히는 이러한 주장이 저돌적이거나 _方的인 때가 많으며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어느 정도의 「뉴앙스」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캔달」을 각오하고 감히 말한다면 오늘날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무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무신앙이라는 현상을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로 또한 새로운 次元을 가지고 나타나는 社會問題로 다루고 있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믿지않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 따라서 무신앙은 현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신앙은 바로 신앙인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끊임없는 유혹이라는 것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聖書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면 거기에는 온갖 형태의 우상숭배를 거스려 전개되는 투쟁이 끊임없이 連綿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각 시대마다 하느님의 使者로 나타나 참된 하느님이 누구이고 또 그분만을 예배하여야 한다고 힘차게 외치고 실증이 나도록 이를 반복하던 예언자들의 설교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참된 하느님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으로 格下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實情이 아닐까?
요즈음 흔히 말하기를 『神은 저절로 납득되는 분이 아니다』라고 한다. 실상 하느님으로 말하면 그분은 우리가 아무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數學의 公理처럼 아무런 「설명」과 「증명」 없이도 저절로 납득할 수 있는 「自明한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신을 쉽사리 「증명」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두가지 뜻을 포함한다고 하겠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는 이미 「神聖한」 사회가 아니며 이 사회는 우리를 신에게로 「인도」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社會的 與件을 의미한다.
또하나의 다른 뜻은 神은 「自明한」 분이 아니란 것이요 인간은 그분을 「포촉」할 수 없고 인간의 全存在를 걸어놓고 追求한 끝에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듯 성서와 역사상 모든 공의회에서 다룬 가장 중대한 「테에마」 중의 하나 즉 『접근할 수 없는 光明의 세계에 살고 계신 하느님 포촉할 수 없는 神』(DEUS INCOMPREHENSIBILIS - 희랍어의 APERILEPTOS)이라는 「테에마」에 접하게 되었다. 이 「테에마」에 대해선 특별히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聖人과 제1차 「바티깐」 공의회가 神學史上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 여건과 신에게로 접근하려는 形而上學的 내지 神學的試圖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잠간 상기한 바 있는 社會的與件을 일단 떠나서 고찰해 보아도 결국 「숨어계신 하느님」 「알아들을 수 없고 포촉할 수 없는 神」이라는 같은 「테에마」에 이르게 됨을 알 수 있다. 가령 假디오니시오나 닛싸의 그레고리오 등 「否定神學」을 대표하는 신학자들, 그리고 『우리는 神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 보다 어떠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분의 말은 결국 우리가 열열히 추구하고 있는 신은, 저 이사야 예언자가 그처럼 훌륭하게 표현한 바와 같이 「숨어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십자가의 요왕이 말하는 「感覺과 精神의 캄캄한 밤」도 같은 뜻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열어보이시는 (啓示) 바로 그 가운데에 벌써 당신을 감추신다. 『사람은 죽지않고서는 하느님을 뵈올 수 없다』 이것은 모세五經의 말씀이다.
요왕사도도 『하느님을 뵈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申命記는 『하느님은 마치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처럼, 모세와 담화하였다』고 서슴없이 肯定하고 있고 성 요왕 사도도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부의 품에 있는 독생성자는 그 분을(우리에게) 알게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막을 횡단하던 이스라엘을 「어두운 밤」에 밝혀주던 「불기둥」이 낮에는 「구름이 되어」 뜨거운 햇빛을 「가려 주었다」는 역설이요, 구름사이로 가끔 새어나오는 햇빛, 밝으 대낮의 응달진 곳, 캄캄한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처럼 어두움과 광명이 共存하는 모순 가운데에 하느님은 자신을 활짝 열어 보이시고 동시에 숨기시고 있다는 역설이다.
하느님은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啓示의 絶頂 가운데서도 접근할 수 없고, 후에 닛싸의 그레고리오가 말하듯이 『모든 本質을 초월하는 분』으로서 감추어 계시다. 그러기에 같은 닛싸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너는 너의 고향을 버리고 내가 지적해줄 고장을 향하여 떠나가라』는 야훼의 命을 중심 「모토」로 삼고 아브라함의 일생을 기록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一生은 곧 人間이 神의 심한 神秘를 찾아 나그네 길을 떠나는 끝없는 移住(EXODE)의 상징이요 豫型이다. 이것이 곧 敎父學에서 말하는 「에펙타스」(EPECTASE)이다. (譯註…EPEKTEIMENOS, 성 바오로의 서간 필립포書 3장 13절에 나오는 말로서 그뜻은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 앞에 놓여있는 곳으로 끝없이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며 不斷의 靈神的進展을 의미한다.)
따라서 無信仰이 우리에게 주는 첫째 교훈은 우리人間은 마음대로 또 경솔하게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即 神의 「接近不可能性」을 우리로 하여금 각성케 해준다는 것이겠다. (쟝 다니엘루 著「플라토니즘과 神秘神學」 - PLATONISMEET THEOLOGIE MYSTIQUE PARIS, 1949-참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