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年(년)에 韓國敎會(한국교회)가 해야할 時急(시급)한 일 (13)
時代(시대)에 맞는 社會事業(사회사업)을
애긍 · 시사에도 外國援助(외국원조) 받는
信仰(신앙)의 植民地(식민지)꼴
救護(구호) · 慈善(자선)은 營業化(영업화) 해가
발행일1967-06-11 [제572호, 1면]
가톨릭적 신앙생활의 기조는 기도와 선행이다. 애덕의 실천 없이 우리는 구령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교회는 일찍부터 많은 사회사업기관을 열어 교우들이 선행(善行)할 길을 열어주었고 또 이 사업을 통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 비해 그리스도교가 사회사업에 많은 힘을 넣고 있는 연유가 저간(저間)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사회사업이라고 하면 으례히 외국서 돈을 얻어다가 하는 걸로 알고 있고 외국원조 없이는 우리는 원래 사회사업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원조라는 것도 결국 외국의 교우들의 애긍임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신앙의 식민지 노릇을 하고 있을 수 없지 않느냐.
첫째 금년부터 교회의 사업, 특히 사회사업은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사업이라고 하면 특히 우리 교회안에서는 병원, 시약소(施藥所) 또는 (무료)진료소 보육원 양로원 나병환자 수용소 또는 나병환자 집단부락 등이 전부다. 이러한 사업종목은 「빠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우리나라에 공식으로 전교를 시작할 초기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사업을 시작할 때는 5·60년전 한국이 아직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당시는 현대적의료시설도 없었고 학교도 없었을 때다.
그러나 시대는 많은 변천을 가져왔고 우리의 생활양식도 변했다. 조국은 바야흐로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지 않느냐. 근대화란 말은 쉽게 말하면 「서구화」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도시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교회의 사회사업도 시대에 맞는, 시대가 요구하는 사업종목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금년은 새 시대에 수응할 수 있는 사업을 긴급히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교회가 경영하는 병원은 61년도에 28개처던 것이 66년도에는 30으로 병원수는 크게 증가되지 않았지마는 「벧트」 수는 지난 6년간 652에서 1201로 배나 증가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교회가 경영하는 병원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사업이라고 할 수 없다. 영리사업의 양상을 띠고 있지 않는가 싶다. 돈을 번다는 의도밖에 가톨릭병원의 특징이 무엇이냐.
오히려 빈곤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시료소는 전국에 불과 24개소로 61년의 18개소에서 현재 6개소밖에 증가되지 않아 병원수 보다 훨씬 많아야 할 것이 오히려 적은 형편이다. 작년도에 24개소 시료소에서 혜택을 받은 환자 수는 93만8천명이 넘었다. 보육원은 25개처, 수용아동 1천8백명 정도로 6년전과 별다른 진전이 없어 5년전인 62년도에 비하면 오히려 5개처나 줄었다.
양로원은 8개처, 수용인원 3백7명으로 61년에 5개소에 208명으로 또한 부진하다.
특색이 있는 사업으론 구라사업(救癩事業)이라고 하겠다.
해방전만 하더라도 가톨릭에서는 구라사업엔 손을 대지 않았고 불쌍한 「나자로」들은 기독교나 혹은 소록도 등에 주로 신세를 졌던 것인데 61년도에 3개 수용소에 776명의 환자가 66년도에는 15개소에 2천4백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구라사업에 있어서도 우리는 세계대세에 뒤떨어지고 있다. 15개소의 구라사업체는 대개 환자들의 집단 부락으로 환자들 스스로 집단을 만들어 교회에 원조를 청해왔고 교회는 본당신부님들의 자비로 극히 빈약한 구호를 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환자들이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집단부락이 과연 몇개 부락이나 될까? 현대의 구라사업은 정착(定着) 사업과 정형(整形) 수술을 위주로 하는 외과병원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구라사업도 금년부터는 이러한 방향으로 그 길을 바꿔야 하리라고 믿는다.
한국천주교 연감(年鑑)에 의하면 교회경영의 직업보도학교는 61년도에 3개소 2백63명에서 작년도에는 16개교 8백5명으로 이 사업을 교육기관에 넣고 있다. 우리는 정식학교사업으로의 직업보도교육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나 사회사업으로서의 기술보도소 · 보육원아들 · 나병환자들 기타 빈곤한 가정의 아동들을 위하여 기술보도를 할 수 있는 기관이 긴급히 설치되어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이렇게 교회가 경영하는 사회사업들을 대충 살펴보면 진정으로 구호의 손이 가야 할 데는 소홀한 감이 있고 수지가 맞는 사업은 확장되고 소비만을 요하는 사업은 위축되는 감이 불무하다. 재정상의 문제가 수반하는 것이 사회사업이니 부득이 한 일임을 잘 알 수 있으나 진실로 형제애가 필요한 사업에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교회가 사회사업을 해야할 본질적인 명분이 있지 않겠는가.
가령, 사회사업에 속한 것은 아니나, 유치원은 75개원으로 1만2천명 이상의 원아를 가지고 있으면서 탁아소(託兒所)는 천주교중앙협의회 통계에도 나와있지 않을 정도로 황무지다. 교회가 대중속에 파고들기 위하고 또 도시영세민들의 생업을 생각할 때 탁아소는 농번기의 농촌민들과 아울러 긴급히 요구되는 시대적인 사업이라 하겠다. 우리가 알기로는 현재 탁아소는 불과 한두군데밖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치원은 교육상에도 문제점이 많지마는 유치원과 탁아소, 어느 것이 더 긴요할까? 도시화의 경향은 앞으로 탁아소나 아동예치소가 더욱 요청될 것으로 안다.
교회의 사회사업도 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공업화될 사회에 부응할 수 있는 체재로 그 사용내용을 바꿀 것은 물론 수용자의 기술교육 등에 주력하여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먹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금년부터 우리들의 사업도 시대에 맞는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