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샬뜨르의 苦悶
샬트르의 사상은 우주적인(우주의 제문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것이다. 그의 사상은 개인의 자유를 고조(高調)하기 위하여 신을 배척한다. 샬뜨르에 있어서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자유다. 나의 생활은 나만이 책임질 일이다. 창조주인 신 즉 나를 마치 종이 인형처럼 접어 만들어 내놓고는 일일이 내 개인적 결단(決斷)에 부질없이 참견하는 그따위 신은 인간의 자유를 우수꽝스럽게 만들뿐이다』
인간은 일단 자신의 자유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게 될때 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샬드의 희곡 「파리떼」에서 오레스뜨는 「제우스」신의 바로 그 잇빨사이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발견했다고 의기양양하게 확언하고 있다.- 『별안간 청천 하늘로부터 자유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를 뒤덮더니 나를 송두리채 휩쓸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것인 이 선의(善意)의 소우주(小宇宙) 가운데 고독하게 오직 나홀로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늘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선(善)도, 악(惡)도, 나에게 명령할 이도, 그 아무것도 없었다』 오레스뜨의 이 말에서 「제우스」는 신(神)으로서의 자격상실을 힘없이 고백한 다음 무력한 유령이 되어 맥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신이 이렇게 느닷없이 떠남으로 해서 인생이 더 행복하게 될 수는 없다. 반대로 샬뜨르는 신 없는 세상이야말로 정말 고통스러운 곳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내가 처해있는 비참을 나로서는 어쩔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나를 용서 하리라』
혹은 『신이 만사(萬事)를 다 이루리라』는 따위의 어구(語句)는 이제 나는 나의 인생을 창조할 전적인 책임을 나흘로 져야 한다는 사실 앞에 그 믿음직한 의의(意義)를 잃고 만다. 나는 나 자신의 신이 되어여야 한다.
만일 내가 그 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위해 비통스러운 헛수고를 감수 할 용기만은 적어도 가져야 한다. 샬뜨르는 이러한 입장을 어느 때와 같이 솔직한 자세로 요약하고 있다. 『신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해야 하며 또한 그 무엇-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명까지도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구원(救援)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해야 한다.
■ 人間은 自身을 救해야 한다
『신이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구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무신론의 기분을 잘 포착한 말이다. 나에게서 나의 책임을 앗아가는 신, 인생을 터무니없이 단조롭게 만드는 신, 나는 진정 절망(絶望)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신, 그러한 신은 이미 현실적인 신은 못된다. 현실적인 것이란 내가 책임을 진다는 사실과 인생은 가혹한 시련이며, 자살(自殺)은 분명히 가능하다는 사실들이다.
신이 현실적인 모습 안으로 뛰어들어 올때에는 반드시 인간 실존의 전체구조를 파괴하고 또한 그것을 한낱 거창한 장난으로 돌려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아늑한 유원지 같은 신을 믿기 보다는 차라리 인생의 무의미(無意味)함을 수긍함이 더 낫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내 자신은 내가 구해야 한다』라는 샬뜨르의 선언에는 또 하나의 모호한 풍자적인 암시가 숨어 있다. 샬뜨르는 또 다른 하나의 희곡중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주인공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도전적(桃戰的)으로 절규 한다. 『나는 홀로 있었다. 나는 어떤 표적(表적)을 요구하였다. 나는 하늘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하늘은 나의 이름조차 몰랐다. 언제나 나는 신의 눈으로 볼때 내가 무엇일가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즉 아무것도 없다.
신은 나를 보지도 않는다. 신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신은 나를 알지도 못한다. 여러분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는 허공을 보는가? 그게 바로 신이다… 신은 침묵이다. 신은 부재(不在)다… 나 자신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신이 나의 기도에 응답할 수 없는 순간 신은 이미 신으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사실 이외에 또 다른 무슨 의미를 가졌단 말인가? 자유의 이름으로 신을 배척하게 되는 일은 신의 허무(虛無)와 좀 더 심각하게 마주칠때 생겨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배척당함을 처음으로 체험하는 때가 바로 이때다.
내가 신의 필요성을 거부하게 되는 것은 내가 필요로 할때 나타나 주지 않은 신에 대한 나의 사무친 반항(反抗)에서 오는 것이다. 신이 그 어디엔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신이 우리와 무관(無關)할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닌가? 우리를 위하여 있지 않은 신은 전혀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을 구원할 자는 홀로 우리뿐이다. -그것이 비록 막막할 정도로 불가능하게 보일지언정.-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