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試圖(시도)의 "본당개념” 건물 아닌 사람 ①
신부는 영적 지도만
본당경계없고 복사 · 장로도 의식에 참석
각종단체 만들어 연구 · 토론 · 대화케
현 본당들 크고 사무적
네린 지도신부 의견 보좌수만큼 본당 늘여야
미국 「오클라호마」시에는 매주일마다 아침에 이웃들과 나란히 벽돌건물로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수십명 된다. 미국에서 시험삼아 처음으로 시도된 본당인 「요안23세회」에서 건물은 집이고 사람이 교회라는 것을 역력히 보여주었다.
이 단체(COMMUNITY)는 가톨릭 경영학교에다 방 한간을 빌려 주일마다 전례를 포함하는 집회를 가진다. 이 본당에는 주임신부가 별도로 없고 교외에서 거주하며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신부가 영신적인 문제만을 담당한다. 본당 경계선도 없이 시(市)의 동서남북 어디서나 신자가 온다. 그뿐아니라 가톨릭신자만이 오지않고 장로교 목사 한 사람도 여기 와서 영성체를 제외한 모든 예식과 집회에 참석한다. 이에 대해 장로교 지도급에 속하는 어떤 사람만이 이단으로 생각하나 그외에는 모두 심려깊은 사람이라고들 한다. 이 본당의 집회방식은 「프로테스탄」의 집회방식을 본따서 하고 있다.
「요안23세회」는 한 평신자의 꿈으로 시작되어 가정, 교회 등에서 대화에 대화를 거듭하면서 해가 지남에 따라 성장해온 것이다. 한 훌륭한 신부의 경험과 연구 노력에다 「프로테스탄」 목사의 과감한 행동으로 발전하여 다른 어느본당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체가 되었다.
「요안23세회」가 본격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게된 것은 1966년 11월 6일 빅터 J. 리드 주교가 윌리엄 F. 네린 신부를 동 단체의 「영신책임자」로 임명한 때부터이다. 회중은 점점 성장해갔다. 산(生) 기독교적 지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본당생활의 경험도 더욱 깊어져갔다.
어떻게 해서 「회」가 발족했고 왜 「오클라호마」에서 시작됐고 처음에 주창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야기는 1950년으로 돌아간다. 네린 신부의 노력과 꿈꾸던 바를 독자적으로 실천에 옳긴 한 평신자 「그룹」의 활동이 이면에 숨어있다.
현재 「회」의 회장인 폴 스프레흐씨는 여덟자녀의 아버지이며 연로한 「엔지니어」인데 「회」의 성장에는 주로 그의 노력이 있다. 스프레흐씨와 그의 부인인 비빌리 여사가 먼저 본당생활의 불합리성을 느끼고 「오클라호마」시의 「그리스도왕」 성당의 신자가정운동(CFM)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래서 CFM은 본당분류안을 채택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1961년 스프레흐씨 가족은 새로 설립된 성 「유진」성당으로 교적을 옮겼는데 1백여 가정뿐인 이 본당에서 스프레흐씨는 평의원이 되었고 합창대, 복사단까지 지도했으며 부인인 비빌리 여사는 모든 여성단체에 빠짐없이 나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신자가 늘어나 약5백여호가 되니 일은 복잡해지고 사무적이 되어버렸다.
1962년 스프레흐씨와 몇몇 친구는 「오클라호마」에서 좀 떨어진 「에드몬드」의 네린 신부를 알게됐다. 그 후 이들과 네린 신부는 서로 의견교환을 많이 했고 네린 신부는 잡지에다 글을 내어 본당들이 너무 크고 사무직임을 지적했다. 그 글에서 네린 신부는 주임신부 한 사람에 보좌 3명이 한 본당에 있기보다는 큰 본당을 4개로 갈라 각각 사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나의 읜견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4명의 신부가 한 본당에서 4천명의 신자를 다스리기 보다는 각각 나눠 한 사람이 천명의 신자를 돌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네린 신부는 「에드몬드」에서 변화를 꾀했다. 그는 소단체였던 CFM이 신자들에 많은 도움이 되고있음을 목격하고 CFM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여느본당처럼 「에드몬드」본당에서도 여러 단체가 조직됐는데 네린 신부는 이 모든 단체가 같은날 함께 회합하도록 했다. 30-40명의 청년 둘이 모인 이 회합은 여러가지 문제에 걸쳐 활발하고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도 많았다.
「에드몬드」의 본당생활이 훌륭하다는 말이 전해지자 스프레흐씨를 비롯하여 몇몇 가족들이 가끔 이곳에 와서 미사에 참예했다.
스프레흐씨는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훌륭하고 정신도 좋았으나 아직도 구태의연한 본당이고 예산과 다름없는 본당구획이 뚜렷했다』고 했다. 그때가 1966년 초였고 그해는 결단의 해였다. 처음에 네린 신부는 교구 성직자위원회에 자산과 경계선이 없는 시험적 본당 설립 허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준비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