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③ 信仰(신앙) 實生活(실생활)과 結附(결부)돼야
교회의 前近代的(전근대적) 포교정책 지양하고
발행일1968-04-14 [제614호, 4면]
종교는 인간사회에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필요한 조건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 삶 전부는 아니라는 해석이다.
바른 삶을 위한 里程標로서의 신앙생활의 그 참다운 값어치는 인간에게 유효하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이지, 신앙을 위해 인간이 종속적 위치를 스스로 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신교에서 자라고 학교에서도 신교로 공부를 했지만 끝내 나의 신앙생활의 만족을 못 찾았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방황한지 어언 8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천주가 나의 궁극의 목표임을 확인하기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신교에서 느끼던 불만을 가톨릭에서도 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우리에게 전래하였던 19세기적인 그 포교방식과 설교 또는 강론에서 똑 같이 불만을 느낀다.
반드시 그리스도나 또는 천주가 우리의 최후적 해결자라는 성경해석에 도전하고 싶다. 나는 성당엘 나 자신의 생활의 반성과 경건한 생활의 정리를 위해서 가고 싶다. 또 그래서 간다. 그러나 지나친 죄의식을 강요하고 무조건적인 절대자에게의 귀의를 요구할 때, 신앙생활의 한계를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만유의 질서 그것을 곧 천주라 해도 좋고 어떤 물리적인 조화 그것을 곧 천주라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어늘, 神의 人間으로서의 形象化를 전제하여 놓고 中世的인 복종 내지 주종관계적 계위를 관념으로 요구할 때, 나는 人間의 가치조차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현재의 신앙생활 강요를 뿌리치고 싶어진다. 西歐의 中世가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회나 성당에 군림하고 있다.
個人으로서의 人格은 완전히 피조물의 위치로 강등시키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平信者나 信者 개개인의 창의적, 도전적 발전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누구는 나와 토론을 벌린 뒤에 극히 利己主義的 종교관을 가졌다고 혹평을 해 주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를 바랄때 人間은 상대적으로 退步한다는 사실을 먼저 상기시키고 싶다. 신앙은 신앙을 갈구할 때 필요한 필요조건이다.
신앙이 우리의 삶을 모두 해결해 주는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많은 利를 한국인에게 주었지만 또 많은 害도 주었다. 그것은 「샤마니즘」적 믿음과 구별될 수 없는 의타심을 기독교인의 사고방식에 심어준 것이다. 西歐 資本主義가 아시아를 침범할 때 이용된 문화침식의 도구로서 비판을 받은 前世紀的 宗敎는 이제 胞衣해야만 한다. 宗敎의 倫理는 市民的 自由와 市民的 實任을 의식 속에 동시에 계몽시켜야 할 가치도 지녀야 한다.
우리의 意識構造를 바꾸는데 신교의 설교나 구교의 강론이 근본적 도움과 깨우침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中世的 信仰에 오히려 속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신앙의 참다운 價値觀은 먼저 個人의 실생활과 직결되어야 하거늘, 『믿으라 그러면 길을 發見하게 될 것이다…』하는 식으로 인간의 가치관을 부정할 때,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타락되어 버리는 결과밖에 아니된다.
시골에 출장을 가서 교회나 성당엘 들어갔다가 설교나 강론을 다 듣지 못하고 자리를 차고 나오거나 귀를 막고 나대로의 기도를 나에게 심고 나설 때,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생활의 위선이나 사치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