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演劇評(연극평)] 「그래도 幕(막)은 오른다」
新劇(신극) 60年(년) 紀念(기념) 合同公演(합동공연)
「아리랑 고개」「土幕(토막)」등
日帝(일제) 韓國人(한국인)의 慘狀(참상) 그려
當時(당시)의 悲劇(비극)이 오늘의 觀客(관객)을 웃겨
우리나라 最初의 劇場인 同時에 國立劇場格이었던 協律社가 1902年에 高宗皇帝 御極40年 稱慶禮式準備의 一環으로 宮內部 所管으로 設置되어 1906年 4月까지 再來의 各種演藝-廣大들의 「판소리」 妓生들의 各種舞踊 등-와 日人, 淸人들의 各種曲藝가 上演되었다.
그러 다가 當時의 완고한 識者들과 官吏들의 傷風敗俗이란 지탄을 받고 協律社는 3年半만에 革罷되고 말았다. 協律社가 革罷된 2年後 李인직이 그 자리에다가 圓覺社를 시작했다. 「我國演劇을 改良할 目的으로」 圓覺社를 開舘한 李人植은 日本에서 배운 知識을 바탕으로 하여 1908년 12월에 自作小說 「銀世界」를 脚色上演함으로써 우리나라 新演劇은 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10년代는 革新團, 文秀里등의 新派劇時代를 수놓고, 1920년代는 本格的 新劇運動期인 土月會時代가 되며 1930년代는 劇藝術硏究會가 外國近代劇의 移植등 「眞正한 新劇運動」을 벌인 劇藝術硏究會時代를 이룬다. 그러나 1940년代에 들어서자 大東亞戰爭이 絶頂에 이르자 日本은 劇藝術을 御用化하여 朝鮮演劇文化協會를 結成, 暗黑時代를 만든다.
그러자 1945년 8월 15일 解放을 맞게 되고 劇界는 다시 左右翼으로 分裂하여 思想紛爭으로 傷處를 받게 되었다. 1948년 政府樹立과 아울러 1950년에 國立劇場이 誕生되어 演劇運動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가 했더니 뜻밖에 6·25動亂이 발발, 다시 挫折의 悲哀를 맛보게 되었다. 6·25動亂後 10여년간 방황한 演劇運動은 1960년代에 와서야 비로소 意識的出發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演劇運動은 近代史의 風雲과 함께 다른 어떤 文化運動보다도 酷甚한 형극의 길을 걸어 온 듯 싶다.
그것은 아마도 演劇이 行動의 藝術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迫害와 受難속에서도 演劇의 횃불은 꺼지지 않고 있어 왔다. 新劇 60年을 맞은 劇界에서는 여러가지 行事 가운데 新劇 60年의 足跡을 한자리에서 눈으로 볼수있도록 하는 『그래도 幕은 오른다』를 構成했다. 1910年代서부터 1950年代까지 10年 週期로하여 當時代의 代表作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교적 人氣있고 觀客의 사랑을 받았던 作品들을 골라서 核心場面만 보여준다.
第一部 『六穴砲強盜』는 1912年 2月 18日부터 21日까지 演興社에서 上演했던 新派劇으로 林聖九가 組織한 新派劇團인 革新團의 두번째 「레퍼터리」. 이 作品은 創作이 아니고 그 당시 日本人들이 歌舞傳座와 京城座에 公演했던 『피스톨強盜清水定吉』을 朴聖九가 번안한 것이다.
全7幕으로 되어있는 것을 그때 觀客한바 있는 朴珍(演出)이 기억을 더듬어 4場面만을 구성하여 新派調臺詞인 抑揚느림 「템포」와 「오버액트」하며 북장 幕등이 그 當時를 회고 하게 한다. 또 그때는 女俳優가 없어 男性女役이었다. 한 新入巡査가 목숨을 걸고 강도를 잡는다는 內容인데 新派劇의 「테제」의 한가지였던 責任完遂와 勸善懲惡精神을 보여준다. 딱따기로 幕여는 신호를 한다.
第2部 『아리랑 고개』는 1929년 11월에 土月會가 公演한 朴勝喜作 單暮劇이다. 土月會 後期의 再起公演作品으로 日帝의 植民政策으로 農土를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間島로가는 離農民의 悲哀를 그린 것으로 日帝治下의 韓國人의 悲劇을 作品化하여 그 當時 觀衆의 共感을 사서 俳優, 觀客, 臨席巡査까지 울렸다는 것인데 오늘의 觀客은 웃고 있다. 새삼 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20年代 土月會에 서는 호르라기로 幕여는 신호를 한다. 鳳伊(白星姬분)役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李眞淳 演出.
第3部 『土幕』은 1933年 2月에 劇藝術硏究會가 제3회 「레퍼터리」로 上演한 柳致眞作의 創作劇(2幕)이다. 崔明瑞(金茂生분) 노인의 家庭悲劇으로 이 작품 역시 日帝治下의 韓國人의 悲劇的 情況을 寫實的手法으로 파헤친 본격적 「리얼리즘」劇이다. 이때는 징으로 幕여는 신호를 한다.
第4部 『檢事와 女先生』은 1940年代에 人氣있었던 新派劇의 代表的인 것으로 金春光作의 5舞劇이다. 1932年 11月에 開舘된 東洋劇場은 우리나라 新派劇의 本據地였다. 이 東洋劇場을 本據地로 하여 우리나라 商業劇은 193·40年代에 그 꽃을 피운다. 『檢事와 女先生』도 그 당시 人氣있었던 紅淚人情劇으로 억울하게 男便을 죽인 殺人女囚가 바로 論告檢事의 小學校恩師라는 스토리다. 양춘役(李혜경분)이 빛났다. 부자가 開幕信號다.
第5部 『시집가는 날』 1950年代에 新協에서 公演한 吳泳鎭作의 3幕劇喜劇으로 原名은 『孟進士宅慶事』인데 시나리오로 만들어 映畵化되어 海外出品까지한 格調높은 喜劇이다. 우리나라엔 喜劇이 별로 많지 않다. 왜냐하면 觀客이 悲劇을 願하기 때문인데도 그 原因의 하나는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吳영진은 이와 같은 鄕土色짙은 喜劇을 내놓았던 것이다.
張民虎의 解說과 옛날의 演劇人들 河之滿(1910年代 新派劇에서 活躍), 卞基鍾(1910~20年代 新派劇에서 활약), 卜惠淑(1920年代 土月會에서 활약), 石金星(1920年 土月會에서 활약), 徐月影(1920年代 土月會와 新派劇에서 활약), 黃河潤(1930年代 劇藝術硏究會 創立멤버)씨 등이 幕마다 등장하여 當時의 回顧談을 펴는 것이 印象的이었다.
柳敏榮(劇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