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여성과 예술」이라는 제목과 같이 여성에 관련된 글이라든가 강연을 청탁받은 일이 있다. 여류작가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지만 그럴때마다 실감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탁을 받고 새삼스럽게 나는 여성의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는데 퍽으나 어렵고 벅찬 일인 것만 같아서 그 숱한 역사의 안개 속을 더듬어 들어간듯 막연해지곤 한다.
적잖은 작품을 써왔고, 작가는 신의 모방자가 되려고 했다는 모리악의 말과 같이 작품 속에 수없이 많은 여성을, 그리고 여성의 운명까지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조박글을 메울만한 여성의 개념이 확립되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분명히 어디가 잘못된 것이나 아닐런지.
모든 것은 다 신비하고 불가해 해서 길을 가다가도 암벽에 부딪치고 사소한 것에의 의문은 무궁무진한 것으로 확대되고… 여성을 모르겠다는 것은 인간을 모르겠다는 것일까.
잠 안오는 밤에 나는 문학과 인간과 여성을 재검토해 보는 일이 있다. 여성문제의 경우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공동운명에 묶여진 인간으로서 그 개성을 추구해 가는 것이 문학이 아니겠느냐고.
공동운명이라는 절대적인 공간에서 개성이 구르는 공과 같은 것이라면, 그 무수히 무수히 많은 공과 같은 것이라면 작가는 그 가치 평가에 따라, 관심의 방향에 따라, 혹은 개인적인 체험에 따라 그 어느 편에 서서 붓을 드는 것이 아닐까.
스토어 부인은 짐승 취급을 받는 노예를 해방시킬 목적에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써서 사회에 호소하였고 「마담 보봐리」를 쓴 프로벨은 마담 보봐리는 나 자신이라 했었고, 입쎈은 「人形의 집」에서 인격소유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을 그려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설은 각기 다른 개성의 소산으로서 그러나 공통된 점은 인간비극이라는 것이다.
어떤 작품 속에 여성의 典型, 남성의 전형, 혹은 시대의 전형, 군인의, 정치가의, 무지막지한 여성을 기타 여러가지 전형을 훌륭한 작가들은 만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라는 바탕에서 性의 구별로 말미아마 인간이라는 특성에서 결코 이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속에 이룩해 놓은 전형은 성의 구별에 그 의의가 있다기보다 개성에 그 의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전반적인 이야기다. 문제를 축소해 본다면 아니 부분화 해본다면 여성과 창조작업, 창조된 것을 받아들이는 여성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지면관계상 여성의 창조적 작업에의 참여문제만을 이야기 하겠는데 언젠가 학생이 내게 『신문에서 보니까 「노오벨」수상작가인 솔로호프가 문학은 여성이 할 것이 못된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괴로운 질문을 했다. 나는 그때 학생에게 그것은 과히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답변하면서도 그 이유로 첫째 남성에 비해 모자라는 여자의 체력을 들었다. 나면서부터 건장한 체구를 타고낫던 미국의 작가 토마스 울프나 불란서의 발자끄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을 쓰다보면 생명과 경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찾작에 종사해본 사람이면 다 체험했을 것이다. 다음 지금가지 여성은 역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일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여성은 항상 사회투쟁이 여파의 휩쓸린 피동적인 존재로서 창조능력은 사장되었었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知的훈련이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 성정의 깊이라든가 넓이, 그리고 지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가치 지우는 능력이 모자란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두가지, 즉 체력과 사회적인 조건 탓인지 아니면 어떤 필연성에 의해 그런 것인지 그것은 지금도 모르겠다는 답변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분은 소설이란 여성이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선에다 두고 한 말인지, 하기야 소설은 에술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무튼 인생과 더불어 문학은 있을 것이며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문학 속에 존재할 것이다. 작가는 또한 끊임없이 인간을 그려나갈 것이며 능력에 따라 노래를 부를 것이다. 男女구별된 능력이건 개개인의 구별된 능력이건 아픔과 더불어 희열과 더불어. 그리고 독자인 여성이나 남성 또한 문학에서 인생을 닮은 예술을 볼 수도 있을 것이요. 인생이 닮아야 할 에술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朴景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