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⑧
典禮(전례)…信心生活(신심생활)의 샘·바탕
信仰的(신앙적) 體驗(체험)쌓게 하고 敎理敎師(교리교사)이기도
그러나 敎會生活(교회생활)의 한 部分(부분)
敎會生活(교회생활)과 典禮(전례)의 구실
전례를 흔히 신심생활의 샘이라고 하는데 샘은 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듯이 「전례」도 「교회생활의 한 부분에 나지 않는다. 「성세」가 「탄생」과 비교되는 것과 같이 「미사」는 「식사」와 비교되며 「고백성사」는 「세수」에 비교되고 「말씀의 전례」나 「성무일도」는 「대화」와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열거에는 활동과 노동이 비교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없다.
미사참여만 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밖의 다른 의무도 채워야 한다. 그러나 전례는 온 그리스도교적 활동의 근거가 된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전례의 의의를 두가지 관점에서 다뤄 보고자 한다. 즉 전례와 신앙 전례와 활동이다.
①典禮와 信仰
전례에서는 대부분의 교우들이 자기 생애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체험을 하게 된다.
신앙에 있어서는 이론적인 교리보다 체험이 더 중요한데 전례에 있어서도 교우들이 교회의 공동체성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다.
공산국가에서 어떤 신부가 써 보낸 서신에 의하면 그곳 젊은이들이 같이 모여서 기도드릴 때 공산주의를 가장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고 한다. 물론 자유세계에서도 물질주의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전례는 체험뿐 아니라 교리도 가르쳐 주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어떤 알현석상에서 『전례는 일반적으로 교직권의 제일 중요한 집행기관』이라고 하셨다. 사실 교회는 전례를 통해 날마다 우리 신앙의 제일 기본적인 교리를 되풀이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 비오 12세께서도 「메디아톨 데이」(천주의 중계자)란 회칙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황들이 어떤 정의를 내릴때 전례에서도 논증의 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신학교에서 전례를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신학자가 될 수 없듯이 앞으로는 전례를 모르는 사람은 신학교수 노릇을 못할 것이다. 전례가 교회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벌써 실천하는 것이니 즉 기도할 때나 도덕적 어떤 다짐을 하거나 자기를 희생으로 바칠때에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전에 벌써 자기신앙에 대한 교리를 배우게 되고 더구나 졸업한 후 성인에서 죽을 때까지 전례를 통하여 교리를 배우게 된다. 회장들도 전례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이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②典禮와 行動
개는 항상 개의 행동을 하고 인간은 항상 인간다운 행동을 한다. 이것은 중세기 신학에 『행동은 본질을 따라 간다』는 오늘날 모든 이가 정하지 않을 수 없는 원칙으로도 알 수 있다. 전례는 인간에게 새로운 존재양상의 이유를 주는데 이것은 새로운 행동의 근거이다. 재생과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전례를 통하여 인간은 달라진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의 행동이 그전과 다르지 않다면 그러한 사람은 전례란 무엇인지 미처 몰랐던 사람일 것이다. 변화된 행동은 전례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뿐 아니라 일단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전례는 날마다 그 새로운 본질을 따라 갈수 있는 힘과 자극을 준다. 아침식사 처럼 전례도 사람에게 하루 종일의 힘을 준다. 바로 그것 때문에 미사가 원래는 저녁에 지내는 잔치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대개의 경우 아침에 지내는 행사가 되었다. 바로 이행사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전례와 우리의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시대를 세웠다. 아침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새벽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우리는 새 시대를 세울 수 있는 힘을 여기에서 다시 얻을 수 있게 된다. <끝>
白쁠라치도(神博·성베네딕또會員·왜관본당임시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