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② 二, 無信仰(무신앙)의 現象學(현상학)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人間(인간) 肯定(긍정)만큼 神(신) 不定(부정)
「휴매니즘 곧 無神論(무신론)이다」
科學(과학) · 政治(정치) · 倫理學的(윤리학적) 體系化(체계화)로
不可知論(불가지론)과 通(통)하는 消極的(소극적) 無神論(무신론)
까뮈의 「회한」 뒤아멜의 「鄕愁(향수)」 등으로 나타나
社會(사회) · 心理(심리) · 文化的(문화적)으로 硏究(연구)돼
實踐的(실천적) 無神論(무신론), 社會學的(사회학적) 無神論(무신론) 等(등)
발행일1967-06-11 [제572호, 4면]
無信仰과 無神論이 서로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 두는 것은 그렇게 부질없는 일이 아니다. 無神論이라는 槪念을 그 자체로 놓고보면 그것은 벌써 一種의 「體系化」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무엇인가 좀 抽象的인 것이다.
無信仰이라는 말도 神을 否定한다는 것이 그 中心을 이루고 있는 人間의 態度를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는 하나의 理論的 체계가 문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無信仰의 主體가 되는 人間이 더 큰 比重을 차지하고 있다 하겠다. 無信仰의 主體가 되는 人間이 더 큰 比重을 차지하고 있다 하겠다. 無信仰을 한편으로는 체계적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現象學的으로 고나찰할 수 있는 所以도 여기에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신론에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범위내에서도 가지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日常生活에서 볼 수 있는 個個人의 실제적 생활태도를 몇가지 典型的思考型에 따라 還元分類해본다는 것은 無益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分類해 놓지 않고서는 이러한 산 態度에서 主流를 이루고 있는 몇몇 傾向을 摘出할 수도 없고, 이러한 여러가지 生活態度는 한없이 變調되는 온갖 「뉴앙스」만 남겨두고 우리 視野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理論的 考察
위에서 이미 마한 바와 같이 無神論을 우선 하나의 理論的 體系로 고찰해보자. 無神論에는 소극적 무신론과 적극적 무신론이 있다. 첫째 무신론은 神의 存在를 긍정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한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무신론은 흔히 不可知論과 연결되어 있는 수가 많다. 이 不可知論은 죠르즈 뒤아멜 같은 사람에게서는 하나의 「鄕愁」로 로제 마르땡 뒤 가아르에게서는 「失望」으로 나타나 있으며 알베르 까뮈 같은 이에게서는 그것이 不信任 및 悔恨과 混合되어 나타난다. 적극적 무신론으로 말하면, 이 무신론은 신을 부정하되 人間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을 부정한다.
니이체를 부연하면서 『神은 죽었다. 「그러니까」人間이 탄생할 것이다』라고 한 앙드레 말로의 말은 이러한 적극적 무신론의 斷面을 잘 드러낸다 하겠다.
싸르트르도 『無神論은 하나의 휴매니즘』이라 하였다.
『倫理的 意識은 絶對者와 접촉하는 순간부터 死滅하고 만다』는 메를로 뽕띠의 말은 너무나 有名하다.
우리는 「反神論」이라는 말을 더러 들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筆者의 견해로는 이러한 槪念 區別이 無信仰이라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얼마간의 도움은 될 수 있겠으나 이 도움은 극히 皮相的인 것에 不過하다. 실상 우리가 반신론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태도는 인간이 그 現存을 빤히 알고 있고 깨닫고 있는 神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면, 人間이 스스로 造作해낸 漫畵요 偶像과 다름없는 神을 거부하는 태도로 落着된다.
前者는 우리가 도스토이에프스키와 베르나노스 같은 作家들의 小說의 作中人物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같이, 神을 拒否하고 虛無를 選擇하는 人間의 悲劇的 實存中의 하나요 그 깊은 構造와 因果를 거의 헤아려 보기 어려울만큼 은밀하게 神을 拒否하는 태도이다. 後者는 여러가지 人間的 感情과 混合될 수 있는 神의 거부로서, 여기에는 오만이 떠 맡고 있는 役割도 작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벌써 우리가 말하는 無信仰의 問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쟝 · 라크르와」가 이미 그의 著書 「現代無神論의 意味」에서 示唆한 바와 같이 우리도 無神論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나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精密科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무시론은 이를테면 科學的 無神論이 될 수 있다. 또한 무신론은, 가령 「맑스」主意에서는 政治的 形態로 나타나며 끝으로, 無神論을, 人間을 긍정하고 이를 再確認하기위한 原理, 어떤 의미의 「휴매니즘」을 위한 하나의 基底로 삼을 때 이러한 無神論을 일러 「倫理的」無神論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쥴로맹의 作品에서 우리는 一種의 科學的無神論의 몇가지 實例를 찾아볼 수 있으며, 베르톨드 브렉흐트의 著書는 政治的無神論, 그리고 시모느 드 보봐르의 여러 著書는 倫理的 無神論의 實例로 들 수 있다.
現代無神論의 가장 中点的 特徵은 다음에 우리가 引用하는 시모느드 보좌르의 말에 거의 빈틈없이 要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의 信仰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마치 『여러 觀念들의 天國에서 人間이 사는 大地 위에 내려온 것』 같은 印象을 받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現代無神論은 人間의 肯定과 못지않게 神의 否定이라는 特徵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無神論은 「人間學的」 無神論이다.
■ 具體的 觀察
이상은 無神論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놓고 그 대표적 類型에 따라 考察해본 하나의 抽象的試圖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無信仰의 主體인 한 구체적 人間을 놓고 볼 때 어느 無信仰人이고 위에 말한 여러가지 無神論 중에 어떤 한가지만을 純粹하게 실제로 生活하고 있고 그러한 無神論的 生活態度만을 排他的으로 取하고 있는 例를 우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개의 경우는 위에 말한 여러가지 無神論의 혼합형이다. 無神論의 諸形態를 社會學的, 心理學的, 文化的으로 연구하는 일은 이제 겨우 시작한 셈이다. 어떻든, 까뮈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보면, 그의 無信仰은 이미 위에서 잠간 언급한 바와같이 不可知論과 悔恨이 뒤엉켜 풀을 길 없는 매듭이 되어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때에는와 마찬가지로 니이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觀点과 展望에 머물러 있는 限, 우리는 하나의 「實踐的無神論」이라는 말을 하여야 할 것 같다. 即 神을 믿는다고 主張은 하지만 實生活에 있어서는 暗暗裡에 神을 否定하는 사람들의 無神的 態度를 일러 實踐的 無神論이라 해서 마땅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無關心」에서 오는 無信仰도 있다는 것을 否認할 수 없다. 불란서의 女流作家 프랑쏘아즈 사강은 어느날 記者들과의 인터뷰에서 『하느님이라니요? 나 그런 것 한번도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가 정말로 이러한 말을 햇는지는 고사하고라도 이것은 무관심에서 오는 실천적 무신앙을 웅변하는 말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社會學的 無信仰을 들지 않을 수 없다. 即 어느 社會의 文化的 환경이 그 社會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無神論的 態度를 强要하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의 무신론은 어떤 反省 끝에 取해진 태도라기 보다는 하나의 社會的 壓力의 所産으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