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면에 연재했던 「神은 어디 있는가」를 이번호부터 제2면으로 옮겨 연재합니다(편집자).
오늘날의 무신론은 위기에 대한 세대(世代)를 대변한다.
현대의 반신론(反神論)의 이러한 발악적인 경향은 소수의 철학적으로 왈가왈부하는데 그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理性)을 잃은 세계, 즉 양차(兩次) 세계대전의 참화(慘禍)를 입고서도 바야흐로 제3차대전의 문턱에서 있는 세계, 「부겐발트」에서 떠오른 연기와 「히로시마」 상공으로 솟아오른 버섯구름(原子雲)에 질려 아 연(啞然)하고 있는 세계, 핵무장으로 인한 공포와 국가간, 민족간, 인간 상호간에 증대해 가는 폭력 앞에서 제정신을 잃어버린 세계, 이러한 세계에 사는 현대인의 좌절감과 당황감을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의 무신론은 바로 위기에 처한 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현대인은 인생행로의 방향이나, 인생의 본질이나, 혹은 인생이 어떤 영구적인 의의(意義)를 지니느냐에서 까지도 이미 어떠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온 사방(四方) 소설가와 극작가들이, 미술가와 시인들이 외치는 쌓이고 쌓인 의문의 합창소리를 듣고 있다. 빠블로·삐카소의 「게르니까」와 봅·다이란 민요 「파괴의 밤」 모두 거의 꼭같이 인생의 무의미함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힙피」족의 해결법은 혼돈된 사회로부터 탈락하는 방법이다.
「하느님의 죽음」 신학의 도래(到來)로 그리스도교회 진영내부가 발칵 뒤집히기까지 함은 실로 이상스런 일이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알티제르는 그리스도교가 현대에 적절한 것이 되려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세계구원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기위해 영원히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물론 불투명한 사상이 많이 깃들어 있긴 하나 한가지만은 분명한 사실같이 보인다. 즉 이와 같이 변모된 상황 속에서 조리 정연한 신에 대한 낡은 철학적 논증들은 문제의 핵심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증들은 언제나 정돈되고 질서있는 우주 안에서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위해 더 고차적인 어떤 존재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논리상 필경 창조주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이 오늘날의 무신론자가 부정하는 바이다. 그들은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이 말이 논리적(論理的)이 못된다고 반대하면 그들은 논리를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사실에 있어서 무신론자가 문제삼는 것은 광난(狂亂)속에 파묻힌 우주 안에서 인간이나 그의 무엇이 과연 논리적일 수 있는가 하는 바로 이점이다.
■ 無神論을 克服하는 길
만일 우리가 오늘날 신에게로 접근하는 길을 전개(展開)하려 한다면, 그 하나는 어떻게든지 오늘날의 반신론이 제시한 문제들을 간파(看破) 함이요, 다음은 인간의 입장을 불신자(不信者)들이 보는 그대로의 눈으로 인식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무신론자가 오늘날의 「덜렘마」라고 설명하는 사실 중에서 진리의 핵심을 받아들일 만큼 성실해야 한다. 오늘날은 서구 문명이 근본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시기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세계에 대한 책임 및 이로 인하여 야기된 통탄할 무질서에 대하여 이렇듯이 크게 각성(覺醒)할때는 아직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궤도(軌道)를 벗어난 시대를 당하여 무신론과 그것이 지닌 과감(果敢)한 숙명론, 즉 인간은 주위의 압도적인 힘을 거스려 용감하게 그러나 헛되이 싸우고 있을 따름이라는 숙명론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摸索) 해야 할 것이다. 무신론을 극복하는 길은 결코 인간의 자유를 손상하거나 말살해 버리는 것이 아닐뿐더러 신을 외계(外界)의 변두리로 몰아내어 뱃머리에 장식한 무익한 조상(彫像)처럼 만들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은총을 함께 대화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양자는 서로 타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구원에 필요한 본질적인 두가지 요소임이 드러난다. 살뜨르와 인간들이 제안한 프로메테우스적 양자택일, 즉 『신아니면 인간』이란 양자택일 대신에 우리는 인생을 신과 인간사이에 계속되는 하나의 긴장임을 천명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 온전히 자유롭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세계의 미래를 보람차게 건설하려면, 진실로 신에 대한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여러 길 중에서 현대의 무신론이 제시한 길, 즉 위기에 대한 주제를 다뤄보자.
오늘날의 위기는 새롭거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님은 「읍」서가 잘 증거하고 있다.
또 그것은 분명히 특수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가 우리의 생애(生涯) 중에서 심각한 회의(懷疑)에 빠지는 시기 즉 신이 부재(不在)한다고 여기는 순간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그날 그날의 여러가지 문제에 부닥친다.
그중 대부분은 사소하여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 들이다. 우리가 어려운 시험을 치를 때는 공부하여 합격한다. 치통이날 때에는 치과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는다.
또 가정불화가 생기면 함께 모여 앉아 화해한다. 일상생활에서 오는 이러한 사소한 고비는 그만두자. 우리는 누구나가 고통스럽고도 견딜 수 없는 처지를 당하면서도 도무지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거나 좋은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경우를 별수 없이 당하곤 한다. 나는 교우(交友) 관계에 있어서나 직업생활에 있어서 일신상(一身上)의 심각한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실패는 나를 순간적으로만 좌절시키고 말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환멸을 느끼게 하며 나의 인생을 전적으로 변모시켜 버린다.
이러한 일신상의 위기는 중병(重病)의 형태로 오는 수도 있다. 한밤중의 혹독한 고통, X-레이 상으로 나타난 불길한 음영(陰影),이렇게 되면 나의 세계는 내 머리위에 사정없이 무너져 내려 앉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치는 비극 역시 하나의 위기(危機)다-대로(大路)상에서 당하는 불의의 교통사고, 국방부에서 보내온 전사(戰死) 통지서 남편이나 아내를 남겨놓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미련을 지닌 죽음 등… 이리하여 인생은 좌절되고 부서지고 조각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