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想(수상)] 黑人(흑인)들의 마음 ① 사람은 흙으로 만들었다
같은 白人(백인)이라지만 十人十色(십인십색)
黑白(흑백) 差別(차별)은 色(색)깔아닌 마음?
白人(백인)만 創造(창조)했다면 그 混亂(혼란)을…
봄철이 되어 밭을 갈고 흙을 만지다가 문득 흙의 빛깔이 많음을 보았다 天主님은 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제2위 聖子 예수님은 十字架에서 온몸의 「피와 물」을 땅에 쏟아 이 적셨는데 이제 나는 의 흙에 「서울치마상치」의 깨알 같은 白色 씨앗을 뿌려놓고 새싹이 터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집 뒷뜰 상치 밭은 지금 새생명의 「將臨」이다.
그런데, 天主님은 사람을 만드실때, 꼭 같은 빛깔의 흙을 못 구했었을까? 사람 하나 만드는데 흙이 즉 土量이 얼마나 많이 들길래 한가지 色으로 하시지 않고 왜 하필이면 黃土·白土·黒土 등 異色진 흙들로 黃色·白人·愚人들을 만들어 놓았을까. 사람의 皮膚色은 참말로 千差萬別이다. 같은 白人이라지만 케네디와 존슨의 빛깔은 같지 않다.
黑人 黑人하지마는 黑人이라고 다 神父 「수단」 처럼 새카맣지 않다. 자세히 보면 世上에는 얼 글이 꼭 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빛깔이 꼭 같은 사람도 없다. 이렇게 數億蓄生을 다 다르게 만들어 놓아도 자기 마누라와 남의 마누라를 混同하는 사람이 있는데 世上 모든 人間을 다 白土로 만들어놨다면 아, 천주님 감사합니다. 그 混亂을 어떻게 하겠읍니까? 第2次 「바티깐」 公議會때 世界萬邦에서 2천몇백명의 主敎님들이 구름같이 꼬여 한자리에 앉았다. 다같은 主敎인데 어떻게 서로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같은 전등불아래 비춰놓고 보니 『저 主敎님은 왜 저렇게 생겼을까?』 우선 놀란 것이 主敎님 自身들이었다. 그래서 敎會는 多樣性 안에 「一致」를 敎會憲章 序頭에 強調하지 않았던가.
天主님이 만드신 各己 「土人」들의 模像은 天主님을 닮았겠다. 제2위 聖子가 우리를 닮은 것처럼. 참말로 황송한 일이다. 天主님은 각가지 빛깔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自己의 氣運을 불어넣어 生命을 創造했다. 꼭 같은 氣運을 한꺼번에 확 불어 넣었다.
우리 어머님은 9남매를 낳아 꼭 같은 입김으로 길렀는데, 우리 9남매는 하나도 같은 놈이 없다.
같은 것은 한 형제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그 착한 킹 목사님이 피살되었다. 黑人이기에 피살됐단다. 솟아나온 피는 그러나, 白人과도 우리 黃人과도 꼭 같은 붉은 빛이었고 그 정화된 영혼은 부활을 고한 천사의 옷빛처럼 희게 빛났다.
그 瞬間世界의 黒人들은 憤怒를 참지못하여 白人을 憎惡하며 약탈과 살륙을 敢行하고 美國天地는 다시 黑白의 世界로 兩斷되었다. 슬픈 일이다. 이러한 悲劇이 과연 피부색 때문일까? 그렇다 白人들 즉 白土人들의 優越主義는 어디서 왔으며 그 實體는 무엇인가?
黑土人이나 黃士人(事實, 내 皮膚를 잘 살펴보면 나는 갈土人, 即 연한 腐葉土人이 지만)들은 남에게 對해 優越感없이, 남을 슬프게 할 줄 모르는 土人들일까? 人種, 皮膚間의 싸움은 皮膚色이 아니고 마음의 빛깔 같다. 「살갗」의 빛깔이냐? 「人間」의 빛깔이냐? 마음이 검은 사람이 있지 않느냐? 내 마음은 검으냐 갈색이냐? 이런 생각들을 뒷뜰 상치밭 흙을 만지며 간추려 본다. 그리고 旅行中 特히 아프리카에서 본일, 當한 일들을 다시한번 간추려 보자. -계속-
金達湖(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