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과도 달리 사신론(死神論)의 이론마저 생겨나는 현대이지만 가톨릭 문학의 품격은 의연히 높아있다. 그것은 가톨릭 자체가 단순히 종교상의 한 종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중세 역사의 명맥을 이어받은 거대한 생명의 실체(實體)이기 때문이다.
「르네쌍스」 이후의 근세 문명은 신을 버리고 인간 중심의 합리주의적 세계를 거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온갖 사리(事理)의 척도라고 생각했을 때 인간은 신과는 달리 하나가 아니고 다수의 존재임을 알게된다. 따라서 합리적인 보편의 정의(正義)에 대한 해석도 각양의 관념으로 화하여 속출하게 마련이다.
또 인간 중심의 아집에 의한 현세적 충족욕은 물질과, 물질을 생산하는 기계까지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태는 18세기 근대정신의 계몽자였던 루소가 이미 우려한 바였다. 그는 <에밀>에서 말하기를 『무종교는 인간의 혼을 생활에 속박하여 타락시키고 인간의 정념(情念)을 저열한 이기심에 집중시킨다』고 하였다.
결국 합리주의와 물질에 의한 근대문명은 오히려 인간에게서 인간정신을 파괴하여 갔다. 여기에 처음으로 심각하게 반발하고 절망하고 회의하던 것이 19세기 프랑스의 「데까당스」 문학이다.
보오들레르에 의해서는 그래도 인간과 사회의 구제원리에 대하여 고민하는 면이 있던 「데까당스」가 와일드의 경지에 이르면 마침내 지쳐서 나태에 떨어진다. 그리하여 찰나와, 관능과 환상을 쫓는 이른바 유미주의(唯美主義) 또는 예술지상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뒤 이 예술지상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자본주의 세계의 체제적 압력 밑에서 인간의 정념을 오락에 타락시키는 일을 하는 문학의 전통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유물론적 사회주의 세계권을 형성한 곳에서는 또한 정치적 「이데오로기」의 도식(圖式)에 얽매어 문학이 선전의 도구로 타락하였다.
문학은 본질상 어떤 세력의 노리개나 도구가 아니며, 애정과 아름다움으로 인류 속에 벽이 없이 충일하는 진실이다. 그 기능은, 말하자면 예술적 형상화(形象化)라는 것은 바로 인간과 사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재창조의 능력이다. 다만 그 수단은 시대와 지역이 특수한 개성에 부응하여 높은 효율을 거둘 것이 요청된다.
이와같이 생각할 때 문학이야말로 종교의 역사적 실천에 더없이 좋은 반려(伴侶)다. 그 좋은 예가 중세에 있어서의 단테의 예이다.
그러나 오늘 가톨릭 작가는 새삼 생각해야 할 몇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첫째 가톨릭의 현대적 실천이 곧 중세에의 복귀는 아니라는 것이다. 중세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제도상의 봉건성과 교권과 정권이 혼동에서 입은 누는 씻어버려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간적으로 공가적으로 무량(無量)한 천주 안에서 우리는 벽을 갖지 않고 영혼과 현실에 애정을 펴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전개되고 있는 교회 일치의 운동, 더 나아가서는 종교간의 소통의 광장을 마련하는 운동은 실로 가톨릭 문학의 입장에 큰 은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톨릭 문학은 지역적 개성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가톨릭이 인류의 성당에 무릎을 꿓은 경건(敬虔) 그것 때문에 지역의 갖은 비정적(非情的) 현실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천주의 원만하고 통일된 법 안에서 우리는 먼저 내 형제와 이웃을 적극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아나똘 프랑스의 낭만이나 페르나노스의 엄격에서도 한발 더 나아가, 오늘의 가톨릭 작가는 자기가 사는 사회 - 조국의 현실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중세적 자연대로의 순수한 인간들이 사랑과 믿음의 진리에 복속토록 즐거운 감복을 주는 작업을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수고의 공적을 가지고 가톨릭 작가는 스스로 영생의 영예를 얻어야 할 것이다.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