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문학)에 있어서의 黑人(흑인)의 危機(위기)
예술·진리 추구보다 現實(현실) 치중
어떤 對象(대상) 앞에서도 黑人(흑인)이란 意識(의식) 못 벗어
볼드윈의『산에 가서 말하다』
검은 社會(사회)에 고정 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내용 간직
그대가 누구이든
어디서 왔건,
고향으로 가보세요
가서, 참 아프리카를 보세요
숲속 깊이
깊숙히 들어가면
그대는 그대 속에 숨은 핵심을,
옛 조상의 무언의 정신을 찾으리
(AFRICA TREASURE에서 「귀로」의 일절)
젖이 흐르는 時節의 참새와도 같이 죽음조차 슬퍼지지 않는 아프리카. 고향에 대한 흑인의 갈망을 우리는 이 詩에서 볼 수 있다.
영혼의 고향으로 향한 뜨거운 감정과 우리가 알 수 없는 흥분과 자존심… 이런 것들을 오늘날 미국의 흑인 작가들은 그들의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새로운 아프리카인의 태도는 단순한 맹목적인 애국심에서도 아니고 또 자기들의 고유의 종족에 대한 복잡 미묘한 충성심에서 울어나온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오늘날 서구인이 이미 잃어버린 自然의 法則을 그들은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다 더 책임감 있는 공동단체의 必要性을 절실히 感知하고있는 오늘날의 흑인作家들은 藝術이나 眞理에 마음을 다하여 추구하기엔 큰 난관에 부닥치고 있다. 그 이유는 現實이던 지고 있는 특별한 문제들이 그들의 마음을 분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미국에서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흑인自由運動이나 인종운동은 위대한 예술가를 要求하기보다 정치적으로 위대한 인물을 要求하고 있다.
이러한 機會의 要求는 흑인 作家들로 하여금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또한 유혹의 낚시에 걸려든 것처럼 그러한 社會運動에 휘말려들게 하고야 말았다.
그들은 그 거대한 물결의 한 복판에서 빠져나올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어 부득히 作家수는 많으나 作品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 대부분의 흑인 作家들은 어떤 제목하에서 혹은 어떤 대상을 가운데 두고서이든 그는 自身이 흑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의 흑인 社會의 作家들중에서 現實의 흐름속에 말려들어 위대한 人物이 되고자하는 야망을 품고 있긴 하나 더욱더 좋은 作家가 되고자하는 야망도 가진 제임스·볼드윈(JAMES BALDWIN) 같은 作家도 있다.
그는 그의 아름다운 처녀 作 「산에 가서 말하라」에서 비록 그 태마가 제한되었고 다양성이 없긴 하지만 가장 완전한 미국 흑인 小說家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이 小說에서 그 自身이 BLACK BOY, JOHN GRIMES로 나타나는 소위 「검은(黒人) 社會」를 그리고 있으나 第2장에 들어가서 우리가 예기치 못한 方向으로 더 깊고 넓게 그 규모가 바뀌어 졌으며 더구나 셋째, 넷째장에는 JOHN이 그리스도 신자로 계승하게 되는 크라이막스에 도달된다.
이 作品에서 그는 정밀하고도 격정적인 言語로서 個性의 신비성을 묘하게 表現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自身의 안점이 「검은 社會」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대서 커다란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외 아무도 오늘날의 황량한 社會를 꿰뚫어 볼만한 예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평해도 좋을는지? 그는 오늘날 英國文學에 있어서 흑인의 위기를 느끼고 있으며 또한 당면한 문제들의 神學적인 性格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있어서 흑인의 역할은 神은 神이지 어떤 사람들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神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自身을 지배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욕구와 즐거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시작도 끝도 아니며 『사랑은 바로 전쟁이며, 사랑은 항상 자라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은 바로 미국의 「흑」과 「백」의 화해를 意味하는 것이며, 인류의 구원적인 융합을 目標로 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흑인 문학의 위기에 입각해서 위와 같은 말은 단하나의 해결의 씨앗이 뿌려졌으리라 믿는다.
金慶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