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③ 三, 無信仰(무신앙)의 釋義學(석의학)
敎會救世活動 위한 原則論的 假說로서
感情(감정) · 情緖(정서)의 深層構造(심층구조) 캐고 主要類型(주요유형) 따라 「精神族(정신족)」 分類(분류)
無信仰(무신앙)의 動機(동기) 추구
慘死(참사) 앞에 「하늘은 전혀 반응이 없지 않나」처럼 流刑(유형) · 위협 · 함정 · 空虛(공허) · 虛無(허무) · 充滿(충만)으로 드러나
文學作品(문학작품) 通(통)해 본 삶의 基調感情(기조감정) 個人(개인)의 具體的(구체적) 體驗(체험) 根據(근거)되기도
발행일1967-06-18 [제573호, 4면]
여기서 말하는 「釋義學」이라는 낱말은 예컨데 요즈음 聖書學에서 한참 論議되고 있는 복잡한 뜻으로가 아니라, 무신론을 좀더 『깊이 精讀해보자』는 뜻으로 알아두기 바란다.
이렇게 槪念限界를 어느정도 明白히 하고 나서 볼 때, 우린느 다음 세가지 角度에서 現代無神論에 接近할 수 있는 可能性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가지 接近方法은 저마다 現代無神論을 하나의 全體로서 眼中에 두고 있으며, 그 基準도 이 세가지 觀点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은 물론이다. 달리 말하면 이 세가지 觀点내지 접근방법을 통해서 무신론에 대한 우리의 理解度를 점점 더 깊이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무신론을 橫적으로 놓고 이를 각 觀点에 따라 차례로 관찰해 보자는 것이요, 따라서 이 방법은 상호보충되는 관찰방법이다.
■ 表明化 한 無信仰
여기서 말하는 무신앙은 노골적으로 表面化한 信仰의 결핍 내지 不在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싸르트르의 作品은 「表明化」한 무신론적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는 神의 觀念이 도저히 和解不可能한 二律背反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存在와 虛無」(L'ETRE ET LE NEANT)의 著者인 싸르트르에게는 무신론이 하나의 휴매니즘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다. 싸르트르는 「악마와 善神」이라는 그의 戱曲(LE DIABLE ER BON DIEU)에서 거기 등장하는 굇쯔(GOETZ)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기쁨 기쁨에 겨워 울어라, 神은 없다. 하늘은 비어있다』 이 대목만 읽어보아도 적어도 이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主要人物의 입을 통해 의심할 여지없이 표명된 싸르트르의 無神論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정도의 이해를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表明化한 무신론의 實例에 우리는 저 유명한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륵흐만의 작품세계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그의 작품 「여름놀이」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女主人公 마리아는 보통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사고로 인해서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대학생을 잃는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녀의 아저씨에게 하느님은 돋대체 자기네 연애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녀의 삼촌은 마리아에게 답하기를 『하느님이 뭐 할일이 없어서 젊은애들의 연애사건이나 걱정하고 앉아 있겠니? 그분은 그런것 말고도 달리 할 일이 많으시단다.』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아저씨에게 그녀는 『하느님이 내게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낸들 그에게 관심가질 터무니가 어딨어요? 하느님이 그따위라면 난 정말 그까짓것 해버릴테야』하고 대꾸한다.
■ 根本的 動機들
그러나 以上과 같이 떠들석하게 나팔을 불어가며 무신론을 宣言하고 나선다고 해도 그와같이 노골적으로 표현화한 무신론적 견해나 태도가 항상 진심에서 울어 나온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러한 表明이 어디서부터 動機되어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삶에 대한 「基調感情」(GRUNDGERUHL)이 어떤 것인가를 발굴해 내야한다. 예를들면 가브리엘 마르쎌의 기조감정은 「流刑」(L'EXIL)이라는 表象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삶을 하나의 「流刑」처럼 느끼는 사람은 가령 그가 벌써 오래전에 죽어간 사랑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自問할 때에 그 사람은 동시에 이 질문으로써 어떤 고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셈이다.
그는 이 고향을 잃어버린 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 고향이 마치 『파도속에 묻혀있다는 「아틀란티드」(ATLANTIDE 譯註 大西洋의 지브라르탈 해협 西쪽에 파묻혀 있다는 想像國)처럼 어느곳엔가 存在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싸르트르의 作中人物들은 삶(人生)을 마치 하나의 위협이요 함정으로 느끼고 있다. 이 기조감정은 어떤 할아버지의 그 손자에 대한 사랑의 경우처럼, (그의 최근 著書 「말」(LED MOTS 참조) 첫눈에도 어떤 信賴感을 어김없이 마련해주어야 하는 人間關係와 實在 외 核心에도 그대로 露呈되어있다. 작크 리비에르는 이 기조감정을 空虛와 虛無로 느꼈고, 우나모노의 경우가 그랬고, 빠스깔과 피란델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가 하면 뒤 보 앙리 알랭-푸르니에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이와같은 基調的 實存體驗이 「充滿」이라는 이메지로 表現된다.
어떤 때는 表面化한 無信仰이 어떤 個人의 아주 具體的 體驗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까뮈는 定期 뻐스에 무참히 치어 죽은 어느 아랍청년의 시체 앞에서 하늘을 가르키며 그 친구에게 말하기를 『봐라, 하늘은 전혀 反應이 없지 않으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까뮈의 이 체험이 그의 나이 열다섯 때의 것이라는 것, 따라서 이 체험은 그의 心靈에 깊은 상처를 남겨준채 惡夢처럼 그의 全生涯를 짓궃게 쫓아다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映畵 「여름놀이」의 女主人公 마리아의 그 몸서리쳐지는 답변도, 이 영화의 감독 잉마르 베륵흐만이 열여섯살 때 겪은 그의 個人的 體驗을 메아리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지적한 바 같이 이렇게 사소한듯한 사건들은 감정 및 정서생활의 깊은 속을 우리에게 제쳐준다. 또한 이러한 사건들은 정서생활의 깊은 底面에 감당하기 어려운 경악과 전율을 야기하는 동시에 또한 삶에 대한 基調感情의 類와 向方 그리고 濃度가 어떠한 것인지 뚜렷하게 해준다.
無신앙이라는 分野에 있어서 敎會가 따라야 할 司牧指針을 모색하는 이 자리에서 특별히 强調하고 싶은 것은 몇가지 主要한 類型에 따라 分類해 놓은 일종의 「精神族」을 牧者들에게 소개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点이다. 敎會는 救援을 宣敎하는 共同體이다 이 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는 거기에 알맞는 方法과 處置가 要求될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말한 感情 및 정서生活의 깊은 內面構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해서 얻은 이해를 實地司牧生活에서 항상 명심하고 참작하여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