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씨는 따뜻하면서도 쌀쌀하다. 장미꽃은 아름다운 모양과 향기를 지니고 있으나 가지가 있어 다루기가 거북하다. 진리는 항상 가까운듯 하면서도 멀고 또는 먼듯 하면서도 가까운데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행동이 항상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발등 밑이 어둡다고 나보다는 남이 더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 안다고 하는 것은 흔히 정말 모른다는 것밖에는 안된다.
싸우는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제삼자가 나타나 『너도 잘못한 점이 많으니 그만두라』고 하면서 한 사람을 떼어 싸움을 말리려고 할때 그 사람은 곧 『내가 잘못한 점이 무엇이냐』하면서 끝내 우기게만 되게 마련이다.
내가 정말 잘했다는 것이 나중에 보면 정말 못한 것인 줄 알게 될 터이지만 금방은 모르는게 보통이다.
노이로제 환자들은 흔이 여러가지로(정신적 또는 신체적으로) 괴로운 증상을 많이 가지고 있어 할 수 없이 여러 의사를 찾아보게 되는데 아무한테도 진단결과에 대해서 신통한 대답을 받지 못한다.
또렷이 어떤 한 기관(器官)이 이러저러하게 상했다든가 병들었든가 하는 말을 들려주었으면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시원한 대답은 못 듣게 마련이다. 즉 언제나 노이로제 증상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내가 마치 꾀병을 앓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것이나 아니냐』면서 짜증마져 나올 정도로 당황하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런 노이로제 환자들은 고통스럽다고 호소하면서도 그 고통을 오히려 즐기는 것이 또한면의 숨길수 없는 진실이다. 이것은 전술한바 「퇴행성」이며 「반복」되는 「무의식」 즉 고통 뒤에서 도사리고 있는 「병중이득」이라는 잠재동기 때문이다. 즉 말로는 병고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울며 호소하지만 마음으론 병보따리를 버려서는 섭섭한 듯한 행동으로 나간다.
이런 상반된 심리를 분석하고 잠재동기를 분쇄하여 한 방향으로 마음을 잡게 하는 것이 노이로제치료의 근본책이 됨은 물론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와 정반대로 상반되는 다른 현상과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사람들에 의하여 늘 관찰 또는 지적되어왔다. 흑(黑)이라는 것은 백(白)과 정반대의 색이지만 언제나 백의 전제없이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음(陰)과 양(陽)은 동양철학에서 뿐만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이용되는 정반대의 개념이면서도 서로 연속성이 있는 또는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는 현상이다. 사람의 심리나 행동을 관찰해도 모두 그런것 뿐이다. 지나치게 겸손을 표시하는 사람은 속에 무서운 적대심을 품고 있다든가 지나치게 명랑한 사람은 이면에 우울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든가 하는 것은 통례이다.
선(善)과 악(惡)도 사실은 구별하기 곤난한 때가 많다. 이세상의 「범죄자」라고 렛델이 붙는 사람을 그 행동내면으로 들어가 관찰할 때 진정한 범죄자란 발견하기 곤란한 것이 사실이다. 노이로제나 정신병 같은 이상(異常)상태도 이와 같은 양극(兩極)의 원칙이 일반적으로 이해될때 그 본태가 들어나도록 설명될 수 있다.
뿔로일러(BLEULER)는 양극현상 중에서도 「암비바렌스」(AMBIVA LENCE)라는 것을 임상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즉 그것은 사랑과 증오의 동시존재라는 현상인데 누구나 사람이 남을 사랑할 때엔 동시에 그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남을 사랑할 때엔 자기 희생이 수반되는 까닭으로 이기적인 「나」의 욕망이 뒤에서 불만을 갖게 된다고 본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사람은 보통 사랑과 증오중 어떤 한가지를 잘 마음속 깊이 억눌러두어 표면에 나타내질 않는다. 그러나 병적이 될때엔 정말로 두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둘다 표면화 하게 된다.
이를테면 표면에 나타내기 싫은 것은 억압해 두어야하는데 그런 억압하는 힘이 모자라거나 파괴 될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가령 정신병자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도 먼산을 쳐다보며 혼자 웃을 수 있는 것 같은 현상이 바로 그런 것이라 하겠다. 꿈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갔다고 하여 슬퍼하는 장면을 보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종종있을 수 있는 것인데 이것도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아버지에 대한 양극 감정가운데서 각성시엔 잘 억압되어 노출되지 않았던 미워하는 감정이 수면중에 억압력이 약화될 때를 틈타서 아버지의 죽음을 본다는 것으로 표면에 들어나는 까닭이라고 보는데 단지 꿈속에서 슬퍼하고 깬 다음에 홍안을 느끼고 하는 것은 꿈을 깰때경부터 깬후에까지 이루어지는 증오 감정을 다시 감추기 위한 꿈의 이차적 조작이며 실제로 깊은 꿈속에선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는 그대로 보고 즐기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사랑과 증오의 「암비바란스」는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가렴 어떤 한사람이 십년전부터 지극히 사랑하던 이성에게 배신을 당했을 경우 그가 지나간 과거를 허사로 뉘우치며 슬퍼하는 호소를 들어볼때 사랑했다는 지나간 과거가 동시에 얼마나 미움에 찬 것이었다는 것을 잘 노출하는 예가 많다. 요지음 사람들이 『神은 죽었다』고 하는 말을 함부로 외치기도 하는 모양인데 이것은 바로 꿈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을 사랑하는 까닭에 미워하는 그러나 세상이 하도 혼잡하여 미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억압력이 끊겨버린 그런 약한자의 잠꼬대 같은 또는 정신병적인 발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은 절대로 죽은 것이 아니지만 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는 병든 사람들 신을 배신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신을 사랑하고 싶어도 제대로 길을 찾기가 혼란하기만한 현대 사회가 큰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兪碩鎭(醫博·베드로 神經精神科院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