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9) <第一話(제1화)> 나를 만나보시려면 ⑨
발행일1968-04-21 [제615호, 4면]
『순녀야. 엄마 기도 드리는데 방해가 되면 안되니까 떠들지 말고 나가 놀아라. 나도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지만 그대로 갈테다.』 승재는 허리를 구부려 순녀의 조그만 귀에다가 입을 대고 소근 거리었다.
『싫어 싫어. 나 소꼽 가질러 온걸. 사탕도 좀 달래야 하구….』
그러자 승재가 채 다음 말을 하기도전에 순녀는
『엄마!』
하고 소리치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승재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마당으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잠시 넋을 잃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마치 어린소녀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솟아올랐다.
(나의 마음이 별안간 왜 이런가)
승재는 불쑥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는 순녀가 엄마를 부르며 방으로 뛰어 들어갈때 무엇때문에 그렇게 허둥지둥 달음질을 쳐서 돌아온 것일까? 지금까지 승재는 정옥에 대해서 이런 감정을 품어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뻔뻔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일부러 무시해 버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승재는 정옥의 새모습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취해온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어리석은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정옥이가 분명히 내가 지금까지 생각한 이외에 어떤 중대한 모습을 지닌 그런 여인이라면 그는 나를 그동안 얼마나 졸렬한 사내로 경멸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치밀어서 승재는 견딜 수가 없었다. 순녀는 첨으로 승재가 생각하는 대로 중대한 모습을 지닌 여인이었을가? 승재는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본 것은 잠시 동안의 그의 기도하는 모습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 하나로 실마리가 풀리듯이 지금까지 겪어온 정옥의 행동이 모조리 어떤 이상한 의미를 띠고 승재의 눈앞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대체 정옥과 죽은 은희와의 관계는 세밀히 따져보면 어떠한 것이었을까?
승재는 갑자기 이런 의혹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승재가 생각해온바 정옥이가 이집의 주부가 되는 야심을 품었다는 억칙은 산산이 깨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옥의 행동은 오직 죽은 은희하고만 매어져 있게 된다. 정으로 하여금 체면과 수모를 무릅쓸 만큼 은희와 강하게 연결시키는 힘은 대체 어디 서 나오는 것일가?
(대모와 대녀.)
그것은 승재도 알고 있다. 교회의식에 의한 종교적 결연이다.
그리고 그 결연은 이 세계에서는 여기저기 무수히 널려 있다. 정옥으로 하여금 그렇게도 참을성 있고 슬기롭고 의젓한 힘을 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에서 오는 것일가? 승재의 의혹은 점점 더 짙어만 갔다. 승재는 가만이 벽에 새로 바꾸어 걸어놓은 아내 은희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퍽 청초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젊은 여성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어딘가 의젖하고 빛나는 슬기를 지니고 있었다. 은희를 보자마자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힌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 종교와는 매우 몰교섭적이던 승재가 교회의 온갖 까다로운 절차와 명령에 복종하며 군말 하나없이 결혼한 것을 그는 지금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결혼한 후에 약속대로 종교에 충실하지 못한 자기를 미안하게 생각할 때까지 없지 않았다.
그만큼 아내 은희는 승재에게 정숙하고 알뜰하였다. 나중에는 주일 미사에도 게으름을 부렸건만 은희는 남편에게 짜증 한번 부리는 일이 없었다.
『당신은 현명한 분이니까 나 같은 어리석은 여자도 깨닫는 것을 못깨닫으실리가 없어요,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거지요』
이런 말을 하며 은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은 일이 있었다. 종교로 해서 승재는 단 한번도 아내에게 불쾌한 마음을 품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내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에는 승재와 정옥이가 머리 맡에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은희는 승재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할 눈치이었다. 그러나 혀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보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오?』
승재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그러나 은희는 말이 없었다.
『글라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정옥이가 얼굴을 들여대고 물었다. 역시 아무말도 없었다. 은희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혀가 굳고 힘이 없어서 말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입은 열리지 않고 은희는 간신히 오른손을 가슴위에 들어 올리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승재를 가리키었다. 그것이 전부이었다. 손은 다시 병석에 떨어지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었다.
지금 생각해도 은희의 마지막 행동은 수수꺼끼였다. 그는 대체 무슨말을 하려고 한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은희가 이미 세상을 떠난 오늘 그의 마지막 행동에 무슨 의의가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승재는 그런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별안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올랐다.
죽은 아내 은희와 정옥에게서 오늘 처음으로 공통점을 발견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승재는 정옥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은희!』
하고 외칠번 했다. 그 가슴에 합장하고 눈을 고요히 감은 모습이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옥의 특이한 행동은 반드시 죽은 은희와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가?
승재는 불쑥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승재 자신은 지금까지 전혀 딴청을 해온 셈이 된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가?)
승재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끼었다.
『계세요? 김선생님 계세요?』
이 때 미닫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