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司牧(사목) · 敎理硏究(교리연구) 參席記(참석기) - 視聽覺敎育(시청각교육)
現代文明(현대문명) 觸媒體(촉매체) “新聞放送” 宣敎(선교)에 善用(선용)을
聖職者(성직자)에만 依存(의존) 말고
現代人(현대인)의 趣向(취향)에 無關心(무관심)한 宣敎態度(선교태도) 是正(시정)
信者(신자)들 積極(적극) 參與(참여)해야
우리는 20세기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것을 무시하고 있지 않다.
특히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교회역사를 통해 얻은 전통을 무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를 소위 과학시대 「매스콤」시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로서 교회활동을 현대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 소망이다.
현대인은 「라디오」를 듣는다. 그리고 영화도 보고 TV도 본다.
신문이며 잡지 등 여러가지 책도 읽는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고 하는 시골 벽촌에서도 「트란지스타」를 가지고 방송을 듣고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유선방송망이 거미줄처럼 분포되어서 「스피카」에 울려오는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앞으로 10년 후엔 부락마다 TV가 들어갈 것이고 도시민들이 절반이상이 TV를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마닐라」회의를 마치고 귀로에 日本을 들러보았다.
현재 日本엔 TV를 가진 가정이 85%라고 한다.
이것이 향상된 그들의 생활이라는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요즘 날이 갈수록 딱딱한 책은 안읽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볼적에는 사진이나 그림에 먼저 관심을 쏟는 실정이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10년 후에는 딱딱한 책을 볼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자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비관적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피할 수 없는 실태가 아니겠는가.
아뭏든 시청각교육을 이미 많은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아마 20년이 채 안가서 시청각을 통하지 않는 敎育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랑하는 20세기다. 과연 자랑할만한 발전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을 전파하는데 있어서도 과연 20세기 문명이 제공하는 이 「매스콤」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뒤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이 여러가지 방법을 우리는 왜 傳敎에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것을까?
가까운 예로 共産黨이 自由롭게 활동하는 國家에 있어서는 그들이 무슨 식당이나 학교를 짓지 않는다.
그것은 政府가 할 일이라고 하면서 政府에 맡겨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를 만들어서 「라디오」방송을 한다. 그리고 「포스타」를 만들어 붙인다. 新聞이며 雜誌며 兒童들이 즐겨보는 漫畵까지도 발간하여 맹렬하게 움직인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信仰을 위한 傳敎活動은 너무도 미약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교회에서 재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일군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모든 활동에 있어 그만치 努力이 부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讀者들은 이 「매스콤」 문제는 敎會 高位層에서 創意力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主敎님들만이 「매스콤」 利用에 대한 指示를 내릴 수 있고 必要한 策定을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放送을 한다든가 TV 「프로」를 마련한다든가 映畵制作을 하는데 神父나 敎友들은 너무나 無力한 責任없는 존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매스콤」 이용문제는 어느 高位層에만 미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放送이 경우를 생각해 보자. 民間放送이 많이 생긴다는 것은 放送聽取人口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民放이 聽取率이 노다는 것은 청취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放送하고 싫어하는 것은 절대 放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읽는 讀者는 마음속에 한번 대답해 보는 것이 어떨까? 思想面에 있어서나 倫理面에 있어서 잘되었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을 장려하기 위해 몇번이나 葉書 한장이라도 放送局 앞으로 띄워보냈는가?
그러므로 이제야 말로 우리는 「매스콤」 利用에 積極性을 띠고 새로운 創意力을 發揮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것은 主敎님이나 神父에게만 미룰 문제가 아니라 바로 모든 敎友들이 생각하고 建議하고 努力해야될 共同의 과제가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 現代에 있어서 映畵나 TV가 「매스콤」의 寵兒라면 그를 통한 傳敎에 神經을 써보야 하고 또한 「라디오」 放送을 듣는 것이 現代人의 生活과 떨어질 수 없는 만큼 하나의 습성化된 현실이라면 「라디오」 放送을 통한 우리의 傳敎方案을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니겟는가.
또는 좋지 못한 「프로그램」을 지적해 몇번이나 放送局에 항의를 보냈는가? 放送局에서는 청취자들의 반응을 얼마나 重視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항의전화 몇통 혹은 항의 엽서 몇장 때문에 연속방송극을 중간에 끊어버린 때가 있었고 放送을 통해서 사과까지도 한 일이 있지 않는가? 이렇듯 우리들은 얼마든지 放送 「프로그램」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글만큼 參與의 門은 開放되어 있다고 본다.
新聞이나 雜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讀者들이 읽기보다는 보는 것을 좋아하는 傾向이라면 딱딱한 읽을거리 대신에 봄으로써 느끼게 하는 方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고 거기에 努力을 기울여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얼마전에 어떤 主敎님께서는 聖堂마다 黑板을 세워놓고 모든 神父들이 그림을 그려가며 重要한 점을 일일히 기록해가며 講論을 하도록 하라고 指示를 내리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筆者는 이 말을 듣고 깊은 共感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우리의 聖堂과 禮節, 귀로 듣는 聖歌는 얼마나 信仰을 培養하고 있는지?
또는 聖堂의 揭示板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져 있으며 얼마나 傳敎에 必要한 그림이나 글이 붙어있는지 反省해 보면서 結言하건대 우리 敎會로서는 다른 여러가지 事業도 重要하지만 우선 철저한 「매스콤」 使用方策에 劃期的인 努力이 있어야 하고 보다 새로운 創意力이 「매스콤」에 發揮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强調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杜峰(大田敎區 尙書局長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