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이 글은 공산알바니아의 전 교육상이었고 현재 미국의 자유 알바니아위원회 회장이 쓴 것이다.】
【로마 NC】 레제프 크라스니지 記 = 『우리당은 언제나 사회주의자혁명의 요소로서 양신면의 혁명을 강조해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대중들의 종교적 신념이나 무가치한 신앙을 그리고 퇴보적인 관습들을 올바른 과학적이며 현실적인 지식의 업적과 대체하기 위해 투쟁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예문은 1962년 알바니아 공산당 기관지 「제리 포풀리트」에 실린 것인데 이 글이 바로 지금가지의 알바니아의 공산지배를 상징하는 23년의 종교탄압과 친중공적인 알바니아정권의 장래정책을 대충 설명해 주고 있다.
헌법상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공산정권은 1944년말 집권하자 곧 조심스럽게 반종교계획을 폈다.
한편으로 종교단체들의 정신적 및 기능면의 효능을 줄이기 뒤한 노력을 꾸준히 시도하고 다른 한편으론 교회들이 지닌 공식적 힘을 그들의 국제공산주의운동 목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이용하려고 애썼다. 동시에 공산정권은 특히 젊은 층에게 반신앙운동을 노골적으로 선동했고 오늘날 모든 학교에서 「맑스 · 레닌」주의가 새로운 종교로서 주입되고 있다.
공산 정권의 반종교운동은 다음 세가지 뚜렷한 경향을 갖고 있다.
첫째 그 정신적 영향력과 강력한 조직 때문에 가톨릭신자들과 「바티깐」을 통한 서방세계와의 유대를 제거하고 둘째 중동 지역의 회교국가에서의 공산파괴활동과 관련된 선전효과를 노려 일정한 한계안에서 주로 이스람교에 관용정책을 쓴다. 셋째 동방정교회는 자기들의 정책을 위해 음으로 교인들을 하나이 도구로 이요하지만 적으로 공인하고 있다.
현재 알바니아는 근2백만인구중 가톨릭이 약10% 동방정교가 약20% 그리고 모스렘이 70%다.
그들은 집권초기부터 교회 수도우너과 학교, 신학교나 도서관 그리고 인쇄소를 정부서 수용함으로써 교회의 수입을 박탈하고 영향력을 저지하고 종교교육을 불법화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새로운 입법과 공보된 명령에 의하면 교회관계인의 선출이나 임명은 모두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로 돼있다. 교회에서 발간하거나 공표하는 모든 편지나 「메시지」나 연설문 등은 사전에 종교위원회가 즉각 각료회의 앞으로 보내야 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소년교육을 국유화 해버려 종교기관에서는 손을 쓸 수 없고 나아가선 종교이원회들이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후생시설 또는 부동산을 운영하는 것마저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정권은 전기 3개 종교 단체에 대해 명목만의 부조금을 준다. 1950년의 헌법과 포교령은 전기3교회의 조직법을 규정했는데 여기서는 교회가 시민들에게 『알바니아공화국인민들이 무제한의 충성을 하도록』 교화시킬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교회를 공산주의자의 선전 「채널」화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법은 성직자들에 대한 정치적 세뇌를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알바니아의 소위 국유화된 교회는 모든 공산국가를 위해 마련된 동일한 맑스주의적 계획에 봉사해야 하는 것으로 돼있다. 도리 수 있는대로 빨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알바니아 정권은 약2백명의 3개 종교 성직자들을 처형하거나 재판도 하지않고 학살하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혹사하여 목숨을 잃게 했다.
이런 종교탄압의 주대상이 바로 가톨릭이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와 사회에 대해 전례없는 암살과 「테로」를 자행하고 정신적 문화적 제가치와 기관들을 파괴했다.
그들은 집권한달 후에 가톨릭의 신문과 유치원 국민학교 수도원, 그리고 고등학교를 동결한 뒤 국유화해버렸으며 체포되지 않은 성직자들은 공산당의 「테로」를 막을 수 없게 방치했다.
1952년까지 국내의 93명의 교구 주재 성직자중 17명이 재판없이 처형되거나 학살당했고 39명은 투오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가 많이 죽었고 3명은 국외로 망명했고 나이많은 13명은 해를 입지 않았다.
94명의 예수회 및 프란치스코회 성직자중 16명은 총살되고 16명은 외국인이란 명목으로 추방되고 35명은 투옥되거나 강제노동형을 받았고 13명은 숨거나 국외로 빠져나갔고 6명은 죽었다. 돈 오리온회의 설교사와 85명의 수녀들은 이태리 태생이란 명목으로 추방되고 2백명의 알바이나인 수녀중 43명은 투옥되거나 강제노동을 당하고 나머지 수녀들도 수도생활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드르레스의 빈센트 프렌누쉬 대주교는 재판없이 투옥된 뒤 고문으로 죽었고 사파의 게오르그 포라즈 주교는 체포된 후 처형되고 프라노기지니 주교는 총살됐고 「슈코드라」의 가스페르 타치 대주교는 경찰의 손에 의문사했다. 90세인 풀라티의 베르나르드 슐라크 주교는 집에 연금되었다가 병사했다. 1951년 가톨릭 교회는 국유화 되고 「바티깐」과의 모든 조직적 및 정치적 경제적 유대를 끊도록 선언했다.
그런데 1961년 소련과 중공간의 이념분쟁은 그들로 하여금 세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행동만을 완화하게끔 강요당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일관해서 갖은 방법으로 전기 3개교를 탄압했는데 이런 정책은 알바니아의 청년층에 종교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으나 대체로 국민 전체의 신앙을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또한 소위 국민들로 하여금 당 제1서기인 엔버 호자에게 가톨릭과 전통적 관습을 공격하는 편지를 쓰게하곤 이를 공개하여 탄압의 미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