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約에 있어서 聖召를 말하자면 特히 몇사람을 추려내야 할 것이다. 아담과 에와, 노에, 아브라함 모이세 人類구원에 없어서는 안될 상징이기도 하다.
아담과 에와는 人類始祖로서 完全한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기 1장 26~30절)모든 후손들로 하여금 神의 계명을 준수함으로 永生과 永福을 받도록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人間的인 교만과 허영으로 신의 소명에 대한 像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잃은 영복을 되찾기 위한 상징으로 또 계명 준수하지 않을 때는 어떤 벌이 내릴 것이라는 본보기로 노아를 보내셨다. 그는 神앞에 의로운 사람이었고 자기의 소명을 완수하였다.(창세기 6장 9절) 神은 萬民의 神이라는 것을 말하고 어떠한 경우에서 섭리로써 다스리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특히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족이 우상숭배자 였다는 것으로써 능히 알 수 있다.(요수에 24·2) 神은 아브라함에게 한민족의 수령이 될 것을 명함과 同時에 神께 대한 공경을 다른 어떤 민족보다 경건히 할 것을 명하고 그러므로 잃었던 人類의 새생명을 다시 얻도록 하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족속에서 처음 自己 창조사업의 최대 걸작품인 인간에게 다시 한번 구원의 혜택을 주고자하신 것이다. 그 아브라함이 이끄는 이스라엘민족은 불행이도 애급의 노예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 파라오 王의 딸의 양자로 되어있던 모이세는(출애굽기 2, 1~10) 神이 약속한 「가나한」 복지로 이스라엘민족을 이끌어갔다. 모이세는 비록 王子로서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自己의 성소가 이스라엘민족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지위도 권세도 버리고 神의 부르심에 순응했던 것이다.
「가나한」 복지에 이사온 神의 선민들은 神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며 현 「파레스티나」 地方에 살고 있었다. 舊約에 있어서의 이스라엘민족의 소명이란 그리스도 「메시아」로부터 시작할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리스도로 시작한 神과의 새로운 계약은 한민족만이 아니고 모든 언어 모든 민족과 색깔을 초월한 그리스도王國의 건설이다. 이 그리스도王國의 한백성이 곧 우리다.
이번 公議會 「교회헌장」은 어떠한 시대에도 또 어떠한 민족에게 있어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정의를 행하는 이는 누구든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聖化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의해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를 성스럽게 섬기는 한 백성으로서 이루고저 하셨다. 이것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者의 소명이란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불리워진 것이다.(마테오 5·13) 또한 소금이 제역할을 못했을때(루가 14·34)의 무가치함을 경고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者 즉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받은 은혜의 위대함을 충분히 깨닫게 하기위해 『이는 한몸과 한성신이 마치 너희가 너희성소를 받을때에 다만 한가지 희망으로 말미암아 불리었음과 같다.』하였다.(에페소 41~10) 우리는 그리스도王國을 건설하는데 마치 한몸의 지체가 다다른 기능과 능력을 가졌듯이 다 다른 소명으로 불리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러나 다만 한목적을 목적에 두고 하늘에 계신 천주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정하신 승리의 상을 얻기로 노력해야겠다.(필립보서 3·14) 우리는 현세에서 生活할때 곧잘 리스도신자인 것을 한탄할 때가 많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神을 따르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구태여 비천한 사람을 간택함으로 세속의 헛된 것을 가르쳐 주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부르심을 받은 너희들을 스스로 볼지니 세속이 지혜라고 하는 지혜를 가진 자 많지 아니하고 세력있는 자도 많지 아니하며 존귀한자도 많지 아니하도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 세속이 어리석다 하는 자 약하다하는 자를 간택하였노라』(고린토 1·26) 이것은 세속적 가치관을 뒤엎는 神的眞理를 바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사람낚는 어부를 부르실때 베드로는 참말 세속적으로는 미천한 자였고 보잘 것 없는 진짜 어부였음을 우리는 잘 안다. 新約에서의 特記할만한 聖召는 무엇보다 사도들이고 그들은 비록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부르심에 순응함으로써 받은바 성소와 간택을 선업으로서 견고케 하도록 더욱 정성을 들였던 것이다.(베드로후 1·10) 천주원하시는 지위를 항구히 보존하고 오직 가치있는 천주의 계명에만 충실했던 것이다.(고린토전 7·20) 舊約에서의 이스라엘 선민들은 新約의 그리스찬들이고 이 그리스찬의 사명은 받은바 성소에 합당하게 거닐을 것을(에페소 4·1) 말하는 것이다. 마치 舊約에서의 이스라엘 선민들이 自己의 공로로 간택된 것이 아닌것과 같이 그리스찬들도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은혜로써 말미암은 것을(띠모테오후 1·9) 알아야할 것이다. 또한 우리를 성소로써 부르셨으니 우리는 거기에 순응할 것이며 대저천주의 은혜와 성소는 취소하지 못할 것을(로마·11·29) 명심해야할 것이다.
舊約에 나타나는 개인성소나 집단성소에서도 볼 수 있지마는 新約에서의 그것들도 결코 따로따로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다만 한 천주의 백성으로서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동성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치 빗방울이 따로 따로 떨어져서는 결코 바다에 못들어 가듯이 우리는 각자가 합심함으로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합심과 협조는 사랑만으로 이뤄지고 천주는 사랑이시다.
金榮煥(大邱大?區악숀協議會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