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님의 沈默
「님」의 沈默을 우리 자신 안에서만이 아니라 남의 안에서도 우리가 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님께서부터 솟구치는 말로 우리에게 말하여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님의 沈默과 通交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님께서 물러나시기가 일수인 우리나름의 침묵안에 絶交되어 남는다.
왜냐하면 內心의 침묵은 계속하는 探索, 반중에 계속하는 絶叫, 深淵을 거듭 거듭 굽어들여다 보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발견하였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침묵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님의 探索을 중지하고 그러한 침묵은 우리 내부에서 죽게 된다. 님을 다시는 더 探索하지 아니하는 침묵은 님께 관하여 울리에게 말하지 아니한다. 님께서 不在하시지 아니하다고 보이는 침묵은 님의 계속하시던 臨在를 위험하게 위협한다. 왜냐하면 님께서는 탐색을 받으실 때 발견되시며 다시는 더 탐색을 아니 받으실 때 우리로부터 도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님의 음성을 듣기를 희망할 때만 님의 말씀이 들리며, 만일 우리 희망이 채워졌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정지하면 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정지하시며 님의 침묵은 活氣가 정지되어, 비록 우리 아름의 정서적인 소음으로 우리 희망을 되채우더라도 님의 침묵은 죽게된다.
■ 님의 번개
시간의 마침에 뜻밖에 오실 그리스도께서는 - 그런데 아무도 그 어른의 오시는 순간을 짐작할 수가 없다 - 시간의 순간마다 당신께서 차지하시는 사람들에게 또한 오시는데 그들은 그 어른의 오심을 볼 수 있거나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 어른께서 계시는 곳에 그들이 있는 것이다. 독수리들처럼 그들은 어찌 되는 셈인지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모이는데 그들은 순간마다 그 어른을 뵈옵는다.
세상의 마침에 어디서 어느때 그 어른께서 나타나실지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도리가 없음과 똑같이 관상하는 영혼들에게 어디서 어느때 당신을 내 보여주실는지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도리가 또한 없다.
사막으로 그 어른을 찾아 온 사람들이 많았으나 거기서 그 어른을 찾아 뵈옵지 못했으며 그 어른과 함께 암자 속에 숨어온 사람들이 많으나 그 어른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거부하셨다. 그 어른을 붙잡기란 벼락을 맞기와 똑같이 쉬운 일이다. 그리고 벼락처럼 그 어른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을 때리신다. 이것은 모든 진심으로 관상하는 영혼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들 끼리만 사막에 모이는 것도 아니오 또는 암자속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어른께서 계시는 곳에 그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그 어른을 찾는가? 무슨 기술이 있는가? 그 어른을 찾는 데는 아무런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어른의 야항으로 그 어른을 찾는다. 그런데 그 어른의 의향은 속으로는 그들에게 성총을 가져다 주시며 겉으로는 그들의 생활을 정돈하시오, 그들이 당신을 찾을 수 있는 정확한 곳에로 그들을 틀림없이 데리고 가신다. 그곳에 가서도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곳에로 갔는지, 또는 자기들이 실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이 「님」과 함께 혼자 있기로 결심하자 마자, 마을에 있거나 숲 속에 있거나 도시에 있거나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그는 「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온 지병선을 밝히면서 번개 자체가 원하는 곳을 벼락치면서 번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번쩍 비친다.
그와 같은 예로 「님」의 한없는 자유가 그러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번쩍비치시면 그는 밝아진다. 그러한 순간에 그는 자기의 갈 길의 중간에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는 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땅위의 은총 생활은 영광의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의 나그네일망정 한순간 영원에 자기 눈을 뜬 것이다. (T. 머튼 語錄에서, 사진=켄타기주 갯새마니 修道院 숲속을 소요하는 토마스 머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