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④ 三, 無信仰(무신앙)의 釋義學(석의학) (續)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宗敎的(종교적) 意味(의미) 지닌 作品(작품)의 象徵(상징) 通(통)해
普遍的(보편적) 意味(의미)의 豫示(예시), 判讀(판독)할 수 있어
죠이스의 「유리씨스」 父性(부성) 찾아 헤매는 精神的(정신적) 流浪(유랑)의 證言(증언)
實生活(실생활) 理解(이해)의 照明役割(조명역할) 하는 文學作品(문학작품)들
反宗敎作品(반종교작품)의 逆說的(역설적) 意味(의미)
事物(사물), 오히려 宗敎的(종교적)으로 보게 해
발행일1967-06-25 [제574호, 4면]
無信仰에 接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文學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길이다. 文學과 作品活動一般에 극히 회의적인 人士들에게도 文學作品이 순전히 作家들의 空想의 所産만이 아니고 實生活을 어느정도 反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진대, 이 文學이 實生活을 좀더 낫게 이해하는데 어떤 빛을 던져준다는 사실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하여야 할 것이다.
■ 象徵들의 釋義學
한 作品에 宗敎的, 아니면 非宗敎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음에 列擧하는 세가지 큰 象徵이 그 작품에 있느냐 없느냐에 많이 달려있다.
이 세가지 상징이란 다름이 아니다. ①法 · 標本 · 약속으로서의 父性 ②罪責 ③慰勞가 그것들이다. 이 세가지 상징은 곧 幼年時節의 追憶의 찌꺼기, 어떤 꿈의 記憶이 우리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證言하는 테에마들이다. 이러한 追憶과 기억이 우리가 살고있는 20세기와는 거리가 먼 거의 原始的 構造를 보여주거나 그것들이 또한 우리를 현혹하고 마비시킨다는 것도 사실이다. 혹은 이 세가지 상징이 어떤 普遍的 意味를 豫告해 주는 象徵일 수도 있고, 이 경우, 이 상징에는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無信仰의 問題와 같은 核心的인 宗敎問題가 연결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레스네 뒤라 RESNAIS - DURAS - 의 영화 「내 사랑 히로시마」 - HIROSHIMA MON AMOUR - 와 그 각본 참조)
이런 意味에서 아알랜드의 文豪 제임스 죠이스의 作品은 우리에게 극히 異例的인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作品을 찬찬이 읽어보는(가브리엘 마르쎌은 이러한 「精讀」을 一種의 「照明」이라 하겠지만) 讀者는 거기에서 어떤 根本的인 象徵的 意味를 判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代表作이랄 수 있는 「율리씨스」(ULYSSES)는 그리운 아버지를 찾아 헤메는 精神的 流浪을 증언하고 있다. 이 小說은 보잘것 없는 유태人 고용원 레오폴드 불룸과 떠블린市라는 小宇宙 안에다 全世界史와 아울러 『옛날 옛적에…』로 始作하는 人類의 全童話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작품의 背景에는 마치 하얀 편지종이에다 몰래 그려넣은 무늬처럼, 어떤 숨은 意味가 一貫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숨은 의미란 다름이 아니고 바로 斷切된 아버지와의 血綠關係이다. 이것은 나중에 一種의 카오스를 낳게 한 起源이 되며 이 작품의 모든 作中人物들이 카오스와 「無意味」 가운데 生을 보내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오트의 희곡 「老政治家」도 英國의 어느 익살맞은 기숙사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또한 거기 어떤 아버지가 자기딸 앞에서 자기의 과거를 告白하는 대목에서 우리로 하여금 희랍神話의 외디푸스(L OEDIPE A COLONE)를 연상케 한다. 희랍신화의 이 늙은이가 오랑캐꽃으로 꾸며놓은 아테네市의 城門 앞에서 말할 수 없는 平和와 안도感을 느꼈듯이 클래버튼 卿도 그의 딸 모니카 - 그녀를 新版 안티고느라 이름해서 무방할 것이다 - 앞에서 자기의 少時적의 罪相을 모조리 告白하면서 꼭 같은 平和와 안도감을 느낀다.
미자막 셋째번 照明을 거쳐 나타나는 影像은 말하자면 그리스도敎的 영상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父性」이라는 象徵이다. 이 父性은 위와같이 人間的 過失을 告白함으로써 再發見 되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理解를 초월하는 平和를 예감케 해 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싸르트르의 희곡 「알토나의 被監禁者들」(LES SEQUWSTRES DALTONA)을 例로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의 몇몇 대목에는 폭군적이며 모든 일을 제 멋대로 처리하는 아버지가 여러번 등장하는 괴로운 場面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장면에서 조차도 그 背後에 참된 아버지의 像이 陰影처럼 떠오르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희곡의 第5막 第1場에서 프란쯔가 그의 아버지 팔에 쓰러지자, 그 아버지는 프란즈를 품에 안으면서 『불쌍한 자식!』하면서 몇번이고 반복하는 場面은 싸르트르의 作品中에서도 드물게 보는 장면이요, 따라서 그만큼 깊은 뜻을 갖고 있다 하겠다)
讀者에 따라서는 이와같은 文學作品의 分析考察이 무슨 意味가 있는지 되이쩍게 여길 분도 있을 것이다. 筆者는 오히려 이처럼 文學作品을 분석하고 고찰함으로써 매우 풍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無神論者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싸르트르의 作品이 철저하게 反종교적이라는 것은 周知의 사실이고 또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그의 作品이 同時에 事物을 宗敎的으로 보게하는데에도 어떤 의미의 開放性을 보여준다는 것도 是認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그의 最近著書 「말」(LESMOTS, PARIS GALLIMARD 1964)에서 그가 「雜談」과 「各說」을 記述하면서 그와는 정반대 되는 참된 말씀(PAROLE)이 무엇이라는 것을 如實히 보여준다면 過言일까? 싸르트르는 잡담과 객설 속에 寧日을 보내고 있는 그의 외할아버지 가정을 漫畵化 함으로써 創造하고 再創造하고 救援하고 審判하는 참된 말씀이 무엇일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라도 엿보게 해준다고 筆者는 생각한다.
無信仰에 좀더 가까이 接近하고 그를 좀 더 똑바로 理解하기 위한 以上과 같은 「釋義學的」 試圖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時代에나 通用도리 수 있는 釋義學的 判斷基準을 이자리에서 提供하고 싶은 意圖는 전혀없다.
우리의 의도는 오히려 우리가 無神論과 無信仰에 接近해 볼 수 있는 길을 司牧的 見地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以上에서 말한 세가지 相互補充的 接近方法을 늘 銘心하면서 우리가 어떤 예술 및 文化作品을 대하고 이를 批判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 세가지 方法을 通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無信仰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 같은 靈魂들을 좀 더 가가이 할 수 있을 것이다. 特別히, 信仰을 잃게 한 最初의 사건이 무엇이었던가를 硏究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중에도 삶(生)에 대한 基調感情의 深知는 救援의 福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確信하는 바이다. 가장 경건한 말들을 表明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가장 경건하고 종교적이 아닌 例는 얼마든지 있다.
이 点에 있어서 뽈 끄로델의 作品이 - 우리의 期待와는 달리 - 駭怪하고 我執的인 여러面을 보여주고 있는 事實은 우리에게 많은 敎訓이 될 것이다.
反面에 보기에는(信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실상으로는 가까운 사람들도 꽤 많다. 이것은 우리가 마르쎌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作品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追憶의 표적을 따라 처음에는 持續이 무엇인가를 차츰 발견해 나가다가 얼마후에는 우리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어주는 倫理的 責任을 受諾함으로써 그전에 잃어버렸던 時間을 되찾게 된다. (그의 作品 「잃어러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 참조)
달리 말하면 어떤 사람들의 「世界」는 실상으로는 閉鎖되어 있는데도 겉으로는 開放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의 「世界」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 閉鎖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으로는 아주 秘密裡에 開放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伊太利의 영화감독 안토니오니의 작품은 神에 關한 問題에 대해서 전혀 無關心한 것 같다. 그의 作品에서 이 問題에 관한 직접적 表明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의 作品世界는 사실상 閉鎖되어 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 세계의 여러가지 要素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그들은 이처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짐승 같은 도깨비」들의 미소한 장단에도 맞춰 놀아나는 괴뢰요 희생물이다. 이 가련한 희생물은, 이 「도깨비」들 때문에 여러가지 파란곡절 끝에 결국에는 그들이 최초에 企圖했던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것을 하게된다. (그의 영화 「情事」 L'AVVENTURA - 참조)
그 반면에 베륵흐만의 世界는 開放된 채로 남아있다. 그의 세계는 수수께끼와 같고 따라서 많은 문제거리가 提起만 되어있지 그 해결이 어디로 落着되었다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作品世界에는 宗敎(的) 문제가 비록 潜在的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提起되어 있다. (그의 영화 「마치 거울 속 처럼」 - SOSOM A SPEGEL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