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내가 神父가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사변은, 우리 3천만 국민이 다 함께 사선을 넘은 피와 눈물의 자국이 아로새겨진 기록이지만, 나의 경우도, 누구에게 못지 않게 몇번이나 목숨을 내던졌던, 묵숨을 건 숨막히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6·25란 말만 들어도 내가 당했던 갖가지 수난과 도피행각을 해온 17년전의 일이 생생하게 피부도 느껴지는 것 같다.
■ 6·25 動亂과 땅굴 속 生活
나는 그때 고향인 38선 이북 장연에 있었는데 중학교를 나온지 얼마 안되는 미성년이었다. 장정은 이미 다강제 징발되어 청년이란 눈을 비비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씨가 말랐다.
다행히 나는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보였기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청』에 들어오라고 남침을 하기 석달전부터 부지런히 통보가 왔다.
그러던 어느날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부락 단위로 자위대를 만들라는 강력한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마음에 맞는 몇몇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숨어버리기로 하였다. 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이 박힌 우리는 그들에게 협력하기 보다는 아주 숨어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한 친구집 뒷산에는, 여기 저기 바위들이 놓여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하나에 지하도가 파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는 그 멋진 시설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소설같은 이야기 같지만, 내가 살아서 신부가 된 것도 그 땅굴 지하도 덕분이라는 것을 나는 여기서 밝혀두고 싶다.
■ 中共軍 介入과 少年 强制徵發
일사천리로 남진하는 공산군의 승리의 소식을 들어가며 우리는 마음속으로 주 성모의 안배하심을 구하는 기구로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기구가 효험을 드러냈는지, 공산군은 차츰 수세에 몰리다가 끝내 북쪽으로 쫓겨가고 말았다.
마을의 치안을 바로잡기 위해서 숨어살던 청소년들은 스스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우리 고장을 지켰다. 이제야 마음 놓고 살게 되었다고 안심할 겨를도 없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산군은 다시 우리 고장을 밀어덮쳤다.
공산당 치하에서 압박을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그 회포를 풀어볼 겨를도 없이 공산당들은 더욱 심한 횡포로 우리를 못살게 굴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반동분자」는 하루 아침에 광장에 글려나와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고 남녀를 가지리 않고 총동원에 끌려나갔다.
동리 사람들의 호의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숨어다니던 나도 끝내 길거리에서 잡혀 군대에 끌려가고 말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느때 잡혀도 잡힐 몸 그것도 잘못 걸리면 『반동분자』로 몰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처지에 군대로 끌려 나갔다는 것은 우선 남쪽으로 도망칠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 越南 義擧 위한 同志糾合工作
처음부터 딴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눈치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나이도 차지 않은 어린 군인이기에, 배치된 진지에서도 나는 귀여움을 받아왔다.
이것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화근이 되었다. 내가 그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병사들은 내가 진짜 빨갱이라고 생각해서, 나와 좀체로 가까이 하려 들지 않았다.
사실 그때 분위기로 보아 나이 먹은 병사들은 남쪽으로 귀순하려는 사람이 상당히 있었다.
내 계획도 그랬기 때문에 몇몇이 조직적으로 일을 꾸미면 손쉽게 성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은근히 그런 사람들을 찾았으나, 나의 진심을 그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에게는 내가 빨갱이 앞잡이로서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공작해 오는 악질분자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중에서 가장 나이 많고 대장격인 한 병사들 몰래 만났다. 그리고나의 진심을 말하였다.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서 종교생활을 할 수 없지 않겠어요?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입니다. 다행히도 나는 그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잘 이용하면 무사히 남쪽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서 일을 꾸며주시지 않겠어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무모한 제안이었다. 그들중에서 하나라도 그 사실을 밀고하면 나는 이세상에 살아남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처지였다.
■ 달이 참나무에 걸쳐 질 무렵에
거사의 그날은 달이 밝았다. 아무도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달이 참나무 가지에 걸쳐질 때』를 마감시간으로 약속했다.
그날 마침 나는 설사병에 걸려 음식도 못먹고 부지런히 변소만 드나들다가 지쳐서 그대로 누운채 잠이 들어버렸다. 깜짝 놀래서 눈을 떠 보니 달에 참나무가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 않는가…
나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있지 않고 연대장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지만 한시간이 멀다고 변소출입을 하는 바람에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왕 도망치는 길이니 빈몸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해서 살금살금 연대장 권총을 훔쳐가지고 변소가는 척 하고 바ㄸ으로 나갓다.
넷이서 탈출하기로 했는데 나까지 합쳐 셋밖에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해서 혹시나 하여 뒤를 돌아다보면서 작은 숲을 지나 바닷가로 나갔다.
나머지 한사람은 끝내 보이지 않고 서운한 마음 가실 길이 없었으나,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의 운명이 더 다급했기 때문에 그이상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나는 단독으로 월남해서 신부가 되었으나 특히 6·25만 되면 고향에 두고온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월남하기로 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탈락한 동지를 생각하게 된다.
崔光淵(가톨릭대학 신학부 경리부장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