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時評(문예시평)] 敎會刊行誌(교회간행지)에서 6月(월)
보다 人間的(인간적)인 主題(주제) 아쉬워
「하늘」…自然(자연) 속에 神(신)을 보는 精神的(정신적) 눈 · 사랑 지녀
쟁쟁한 敎會(교회) 筆陣(필진) 있는데도 허무하기만 한 가톨릭誌(지)들
6월호 가톨릭 잡지들을 읽어보고 한국 가톨릭 문학의 부재(不在)를 새삼 절감했다.
프로테스탄 쪽만 해도 이렇지는 않다. 그들은 상당수의 시인과 작가를 현역문단에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또한 교회 지면에 많은 작품을 발표한다.
세계적으로는 종교문학이라 하면 가톨릭 문학이 그 품격과 전통에 있어 탁월한 위치에 있는데, 한국에서 특히 가톨릭 문학이 부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에서 가톨릭이 국민 감정 속에 정서적으로 순화(純化)되어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791년에 이미 신해순교(辛亥殉敎)를 치른 가톨릭이 1885년에 들어온 신교보다 교인 수가 훨씬 적다는 현상도 이와같은 사실을 방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쪽에도 시인이나 작가가 결코 태무한 것은 아니다. 월평의 본지(本旨)에는 관계없는 이야기이지만 사정에 좇아서 조금 생각하여 보자.
시에서는 이효상, 구상, 김남조, 김윤성, 박성룡, 이석현, 허영자, 소설에서는 박경리, 한무숙, 이선구, 김의정, 희곡에서 이서구, 유치진, 이들이 가톨릭신자 문학인이다. 이 외에도 필자가 생각하지 못한 시인 작가가 여러명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가톨릭지면에 별로 얼굴을 비치지 않는가. 그것은 한국의 가톨릭 교회가 너무 완고한 데에서 빚어진 현상일 것이다.
거의 교회가 직접 주재(主宰)하는 지면에서 편집자는 청탁하는 작품이 관연 가톨릭적일 것이냐에 대해 너무 신중을 기하는 것 같다.
그 결과 매우 가톨릭적이라고 생각되었을 법한 한 작품을 「가톨릭 청년」 6월호에서 찾아보자.
고명선 수사의 「聖心이여」란 시가 이 예에 든다.
가시로 얽혀진 용광로
아니 면병 안에 타오르는 심장
내 죄 댓가로 일으킨 화염
지극히도 사랑의 향내를 태우시다
한 독실한 수도자 또는 교우의 신앙적 단상(斷想)으로써 이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한 문예작품으로서의 시로써 이것은 불가하다. 비록 가톨릭 문학이라 할지라도 문학의 주제는 보다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
신, 신앙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흠숭하는 것은 보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것이지 문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 문학이 신을 배격하는 인도주의사고에 뿌리 박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창조주의 손길이 묻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생명을 가꾸고 빛내는 것이 가톨릭 문학의 작업이다.
창조주의 선물은 살덩이와 같은 물체 뿐이 아니다. 생명과 정신과 사랑과 아름다움, 이것이 모두 주의 선물이다.
그리고 주의 선물을 소중히 하고 기리는 것이 또한 주를 사랑하는 일이다. 이것이 가톨릭 문학의 제일의 수단이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 때 「가톨릭 소년」 6월호에 발표된 허영자씨의 「하늘」이란 시는 비록 소품이기는 하지만 알뜰한 수확이다.
너무
맑은 눈초리
온갖 되는
드러날 듯
부끄러워
나는
숨구싶어…
이 시인은 자연 속에서 오히려 신을 보는 정신의 눈과 사랑을 가졌다. 그리고 영원히 부족한 존재인 인간을 알았다.
춤추는 한 떼의 수선화에서 기쁨의 정령(精靈)을 본 워즈워스와도 같이 우리는 자연에서 생활에서 그리고 우주에 찬 모든 생명에서 주를 느끼며 사는 생활을 문학을 통해서 이룩하도록 하자.
그러나 지금은 또다시 「수다세이」와 「파리세이」가 너무도 성하는 시절, 우리는 먼저 이들을 회당(會堂)에서 내쫓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스도를 오늘 충실히 본받을 수 없을까. 가톨릭문학은 이 혁명사업에 주체세력이 되어질 수는 없을까.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