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⑤ 四. 現代無神論(현대무신론)의 根本的(근본적) 動機(동기)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발행일1967-07-02 [제575호, 4면]
無信仰의 숨은 動機가 무엇인지 그 地圖를 이 자리에서 한번 그려보기로 하자. 이와같은 混在的 動機들은 흔히 겉으로 明明白白하게 表明된 것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敎訓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筆者가 지금까지 敍上한 바로써도 이 点에 대해서는 넉넉히 수긍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 二元論의 拒否
니이체는 그리스도교를 일러 「大衆用 플라토니즘」이라고 말하였다. 『정교는 人民의 阿片』이라고 말하던 맑스의 말과 꼭같이 이제는 格言이 되어버린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와같은 異議를 우리는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그 자체로 보아서도 옹졸하고 비관적이며 淸敎徒的인 어떤 정신적 전통이 西歐세계의식의 가장 깊은 뿌리에 악몽같은 상채기를 남겨 주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다』 이것은 모렐(GEORGE MOREL) 신부의 말이다.
同師가 이어서 인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오캐지(S. O. CASEY)의 말은 우리를 일깨워 주는 크나큰 경종이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것인가? 『이 세상에 사람이 存在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저승(彼岸의 世界)이 어떻게 생겼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는가! 이 방면에 대한 노력이 불타는 것일수록 그만큼 人間은 그가 살고 있는 現實世界를 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現實世界가 바로 우리의 고향이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를 가리켜 서글픈 眞理라고 말하여야 할 터무니는 조금도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잠시의 은신처요 의복과 양식꺼리에 지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거기에서 百合花와 장미꽃, 사과와 배(梨)를 딸수만 있다면 이것은 벌써 人間을 위한 고향이 아니겠는가! 人間이 不死不滅 하든지 말든지 간에 말이다.』 (G. MOREL의 引用 「LES IMAGE DE DIEU」 DIEU AUJOURD'HUI PARIS, 1955 P, 188)
讀者中에는 「착각의 미래」(DIE ZU KUNFT EINE ILLUSION)라는 프로이드의 論著를 알고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 論著도 결국 따지고 보면 종교는 人間을 슬쩍 해치워버린다는 反宗敎的異議의 한가지 變調에 지나지 않는다.
즉 종교는, 人間으로 하여금 그 自身이 責任져야 할 여러가지 功過와 제안에 지니고 있는 精力을 發揮해서 실현할 수 있는 理想도 걸핏하면 超自然의 神을 自然界에 도입하여 「說明」하거나 저 세상(彼岸의 世界)에서만 可期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說明」은 자기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者의 脫出口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저 세상」은 현실세계에 있어서의 사명과 과업을 기피하며 엉뚱한 공상에 사로잡힌 비뚤어진 의식을 가지고 있는 人間들의 착각의 所産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自然의 神」의 否定
벌써 오래전에 쎄르띨랑즈(SERTILLANGES) 神父는 말하기를 죽었다고 하는 神은 참된 신이 아니고 自然의 神이라고 하였다. 하기는 오늘날에도 「宇宙의 表적」을 따라 神性에로 引導해 주려는 所謂 有神論的 宇宙論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이러한 試圖의 合法性을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筆者에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 有神論的 宇宙論이 오늘날 前例없는 批判의 對象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숨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神父는 그의 저서 「神과 現代人」(DIE GOTTE SFRAGE DES HEUTIGEN MENSCHEN, EINSIEDELN 1956)에서 數世紀를 두고 내려오던 所謂 「그리스도교적 스토이씨즘」이 이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에따라 現代人間이 宇宙 앞에 홀로 서있는 自身의 孤獨과 또한 이 宇宙를 혼자 떠 맡고 있는 自身의 責任感을 점차로 어떻게 發見하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人間은 스스로가 自然 안에서 마치 어머니 품속에서와 같은 保護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이제는 가질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人間에게 好意를 보여주는 일종의 神性이 自然界 안에 現存하고 있고 눈으로 역력히 볼 수 있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非神聖化」한 것은 宇宙만이 아니다.
人間들의 世界도 非神聖化하였다. 10여년전부터 우리는 「世俗化」란 말을 싫도록 많이 들어왓다. 이 世俗化란 곧 歷史的 그리스도敎의 어떤 「制度的」인 要素로 해서 일단 神聖化하였던 社會가 오늘날에 와서 人間들의 손에 다시 넘어가는 過程을 의미한다.
칼 맑스와 同時代의 사람이며 그의 論敵이었던 프루동(PROUDHON)은 또한 맑스 못지 않은 反그리스도敎者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바로 有神論을 위해서 反神論者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그의 참된 意圖는 人間의 運命을 非宿命化하고 그에게 策이맘을 다시 일깨워 주려는데에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