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司牧(사목) · 敎理硏究(교리연구)」 參席記(참석기) - 晩時之歎(만시지탄)의 敎會門(교회문) 開放(개방)
神(신)에서 離脫(이탈)하려는 人間世界(인간세계)와의 橋梁(교량)
그리스챤 「메시지」의 바른 適應(적응) · 그릇된 適應(적응)
神(신) · 人間(인간) 競爭(경쟁)하는 듯 … 現代
敎理(교리) 科學世界(과학세계) 發展(발전) 不均衡(불균형)
過去 … 眞理表現(진리표현)의 不足(부족) 隠蔽(은폐)와 無事主義(무사주의)
問題(문제)는 可能性(가능성) 方法(방법) 實現(실현) 形式(형식) 地域(지역) 民族(민족) 時代(시대) 文化(문화) 등 許多(허다)
이 글은(일반적으로 많이 논의되며 각지에서 벌써 그 초보적인 결론과 해결책을 찾았고 또 금반 「마닐라」에서 있었던 「사목교리연구주간」에 참석하여 많은 토의를 거친 수제(首題)의 문제를 다루어 본 것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구세(救世)의 복음이며 인간과의 교량적 역할을 하여 그들의 행위와 생활에 파고 들자는 의도가 처음부터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지」의 적응에 대한 말을 하자면 우리는 직각적으로 인간과 그들의 세계와의 활동적이며 구원적인 접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응의 이와같은 선구자인 활동은 도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까지 교회는 세속과 높은 담을 둘러쌓고 그 성곽 속에서 타세계와의 접촉을 분별하고 지내 왔다고 이제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교회 스스로가 오늘의 세계에 처할 길에 나섰다고 하겠다. 우리 교회의 이 선구적인 모범이 꼭 필요한 것이며 또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금일의 세계, 특히 인간으로 형성된 세계와 멀리 고립되어 있다는 두가지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바이다. 이제, 우리는 이 신앙의 「메시지」가 시세에 맞는 간결한 말로 표현되어 현대인의 강력한 구령의 힘으로써 이해되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메시지」의 필요성은 누구나 다 의식하고 있는 터로, 우리가 만사게 개혁을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에 너무나 냉동된 사상과 생활로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흥미를 잃은 현대인은 자기 구령이 욕구마저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이러한 세계에서 다시 그 힘있는 빛을 찾아 얻으리라.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몸에 맞지 않는 묵은 옷감을 정확하게 재단하여 개조하는 법을 아는 일이다.
적응의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가능성, 방법과 실현형식, 현대인과 의 접촉에 있어서의 적응, 아세아에 있어서, 한국 그리고 구체적으로 각 민족 그 시대와 문화에 어떻게 적응할 것이냐? 하는 등등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또 이 문제들은 하나 하나 그 원칙은 물론 구체적인 상황에 관해서도 각각 다른 결론이 있어야 하겠고 연구 · 고찰 · 시도 등 실로 앞으로 할 넓은 분야가 있어 전도요원한 감이 불무하다. 여기서는 몇가지 참고될만한 것을 적어 둘 뿐이다.
「메시지」 자체의 적응에 대하여 론급하기 전에 우리는 종래에 가졌던 협의의 적응의 그릇된 생각을 배격하자. 그것은 이 고귀한 「메시지」의 본질적인 권리가 언명을 천박하게 하며 임기응변으로 그르치기 때문이다. 또 그렇다고 각종 문제들을 음폐한다든지 각종 난관들을 비밀에 붙여 회피하여 무사주의로 지내는 것은 더욱 옳지 않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만사가 시대와 연결되고 변화무상하여 개신을 요망하게 마련이다. 교리의 지난날의 공식적 해석은 물론 옳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자체가 우리들의 손으로 흐려질 수는 없지 않느냐.
「바티깐」궁의회는 그안에 만고불변의 진리를 간직한 「메시지」에 가히 자각을 촉구했다. 우리는 교회가 결정하며 가르치는 각종문서 따라 교리를 복음의 유일하고 영원한 표현으로 알고 있었고 동시에 복음의 생활한 원천인 천주님의 창조적인 말씀 자체와는 아무 내적인 접촉도 없이 있는 동안에 진리의 확고부동한 체개로서의 「메시지」가 필연적으로 나타났으니 우리는 그 진리를 가히 받아들여 설명하고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배워 알고 있다는 것 우리가 천주님과 친근하고 그의 사업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들 뒤에는 궁극적으로 거기에 음밀한 확신이 서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신자나 미신자들에게 확실성과 우월감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만족의 창문을 열고 인류의 화급한 문제와 기대들이 우리를 진정 · 내면으로 감동시케 우리 영혼을 불태우면 순식간에 지난날의 천주님의 진리는 곧 우리의 진리가 되어 우리들 자신의 가자가지 문제와 동경들에 대하여도 그 응답과 약속이 있으리니 이것이 곧 천주님의 신의와 사랑의 비길데 없이 고귀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다소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진리를 보다 더 많이 배워 익히는 일이 생기고 마침내 그 진리 자체와 해우가 성취된다. 이렇게 되면 교리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거기에 대략이나마 표현된 천주님의 「메시지」가 결정적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그 광명이며 이 광명 안에 나를 위한 구속의 「메시지」를 인식한다. 「메시지」는 현실적인 것이 된다. 「메시지」는 근엄하기 보다 활동적이어서 생육(生育)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시지」는 우리 시대에 상응한다. 설명을 위하여 한가지만 예를 든다. 현시대의 세계상(像)은 과학의 성과에 상응하여 발전적인데 교리의 시계상은 지지부진한 개량주의로 서서히 그 좁은 길을 뒤딸아왔던 것이다. 옛날 교리책을 읽으면 마치 「시초」에 하느님이 한꺼번에 세상을 만드신 것 같은 인상을 갖게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지연은 천주님의 창조에 속하는 반면 인간은 그들의 활동으로 마치 천주님과 경쟁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요 당하고 있다. 활동적인 창조 사상은 천주님에 의하여 지금도 앞으로도 무궁하게 창조의 대업이 계속됨을 알게 하고 있다. 푸른 숲은 천주님이 창조물이나 도시는 천주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전연 당치 않다. 도시 또한 천주님의 사업으로 최고 피조물인 인간이 그 스스로의 모상을 도시안에 표현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취한 바는 다 천주님의 창조다. 「메시지」 자체의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통달은 가능하다.
「메시지」의 근원인 성서와 교회의 신앙의도와 현시대의 자각 등의 종합적인 정통이 이것을 알게한다. (계속)
엘리사벹 케르켈링(AFI(국제여자협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