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브라질」 이민지도신부로 임명받은 것은 1965년 10월 6일이었다. 나에게는 몇달 전부터 노 대주교님과 안 몬시뇰로부터 「가톨릭 이민」의 지도신부로 가달라는 요청이 누차 있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외국에 나가서 일할만한 능력이 없을뿐더러 본당 일과 신용조합 일에 매여 있는 몸이니 다른 신부에게 위임시켜달라는 뜻의 사의를 표명했다.
그런데 10월 6일 갑자기 교황사절의 호출을 받고 사절관에 나가니까 주디체 대주교께서 무조건 임명장을 주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중임(重任)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말이 지도신부지 나는 임명받은 그날부터 「가톨릭이민회」 대표격으로 동분서주 이민 수속을 재주러 다니기에 바빴다. 그때만 해도 브라질 대사관이 우리 나라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본으로 가서 제일차 이민 53세대에 대한 「비사」까지 맡아 주었다.
제일진 53세대를 부산에서 이민선에 태워 보내고 비행기로 서울을 출발한 것은 11월 19일이었다.
「빠라나」주 「폰따 그로싸」시에서 32「킬로」 떨어진 「산따 마리아」농장에는 「브라질」 정부로부터 이양받은 약6백20RK(1RK는 약7백평 총43만4천평)의 광막한 평야가 우리 이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라질에 도착한 나는 「가톨릭이민회」를 대표해서 우선 「리오 데 자네일로」에 있는 교황대사와 정부 이민관계관을 예빵하여 한국 이민이 브라질을 향해 출발했다는 보고를 했다.
내가 우선 서둘러야 할 것은 제1진 53세대 3백15명의 임시 수용소와 식량, 그리고 1백10「톤」에 달하는 그들의 이삿짐 통관과 수송문제였다.
브라질 교회 당국의 적극적인 협조로 「산타 마리아」 농장 근교 「카스트로」시(농장에서 차로 8시간 거리)에 있는 군막사(軍幕舍)를 빌려 입주할 집이 완성될 때까지 한달동안 신세를 졌다.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인 11월 5일부터 우리 이민들이 입주한 주택의 택지(宅地)를 마련하기 시작하여 내가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부분적으로 기초가 다듬어지고 있었다.
NCWC의 기술원조로 약 두달만에 53동의 주택이 완성되었고 1966년 3월 15일부터 월말까지 입주가 완전히 끝났다.
이삿짐을 옮기는데도 그곳 주둔군의 많은 도움을 입었다.
내가 현지에 도착해서 가장 곤란했던 것은 나 자신 거처할 곳이 없었다는 점이다. 주택건립은 모두 자기부담이었기 때문에 성당이나 신부의 숙소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건축기사의 호의를 받아들여 자그마한 집을 하나 얻어 들었다. 주일미사는 이민 중에서 좀 큰 규모의 집을 마련한 김갑인(요셉) 회장 집에서 드렸다.
이렇게 해서 제1진 53세대를 정착시키기는 하였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제1진에 끼지 못한 그들의 가족과, 제2진으로 오게될 13세대의 입국에 따르는 모든 수속 절차를 돌봐주어야 하겠기 때문에 자주 「리도 데 자네일로」에 들러야 했다. 뿐만 아니라 송금 절차가 잘못 밟아서 돈이 엉뚱한 곳으로 떨어져 적지 않은 고생을 하였다.
6월에 들어가 추가 제2진 13세대가 낙후된 1진 가족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수자상으로는 66세대 4백여명의 한국이민부락을 형성하였으나, 그동안 상당한 인원이 부락에서 이탈하여 도시로 나갔고, 더러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말이 「가톨릭 이민회」지 전체 이민의 3분의2가 미신자이거나 프로테스탄이었기 때문에 지도신부로서 겪은 고통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성당을 짓기 위해서 동분서주 바쁘게 돌아다닌 보람이 있어 8m-25m의 목조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성당을 지을 때 특히 고맙게 생각한 것은 그 지방의 유지 닥터 브란둥의 호의였다.
자기집에 사설(私設) 경당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성당지을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그 경당을 기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로 7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이고 보면, 그 희사를 받아들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두어두고 제대만은 뜯어 옮기기로 하였다. 그 일에만도 여섯번 왕복을 해야만 했다.
이 성당에는 신부의 제의, 제구, 동고상이 완비되어 있어 어떤 신부가 가도 그대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다.
우리 이민들이 당면한 또 하나의 시급한 문제는, 교육문제였다. 앞에서도 잠깐 이민의 이탈문제를 말했지만, 그들의 주요한 구실이 자녀들의 교육문제였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지사와 주교에게 구원을 요청 우선 천막학교를 마련하였다. 정부에서도 우리의 교육열에 감탄하여 문교당국의 특별배려로 국민학교를 지어주었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6세대가 이주한 「산따 마리아」농장에는 지금 28세대 약2백명의 한국이민이 겨우 남아있다.
뒤에도 말하겠지만 이러한 이탈경항은 정부의 무계획적인 이민정책에 연유한 것임을 주장하고 싶다.
張大翼(이민단 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