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⑥ 四. 現代無神論(현대무신론)의 根本的(근본적) 動機(동기) (續)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宗敎的(종교적) 및 神秘的(신비적) 體驗(체험)에 대한 不信任(불신임)
人間投機(인간투기) · 모험 · 決斷(결단) 모면하려는 者(자)의 加護者(가호자) 취급
成人意識(성인의식) 强(강)한 現代人(현대인)의 神觀(신관)
人間悲劇(인간비극) 앞에 「沈默(침묵)의 神(신)」 「失敗(실패)의 神(신)」으로 단정
神(신)을 우는 애기 달래는 保姆(보모)로 錯覺(착각)
발행일1967-07-09 [제576호, 4면]
말레그(MALEGUE)는 現代人이란 經驗만을 믿는다는 사실을 일찌기 看破하고 이 現代人을 하느님께로 다시 歸依시키기 위해서는 어떻든 絶對者가 이 現代人의 可經驗圈內에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作品은 이러한 그의 持論을 비교적 잘 反映한다고 하겠다. 특히 그의 「검은 돌들」(PIERRES NOIRES)과 「救援의 中産階級」(LES CLASSES MOYERNES DU SALUT)에서 그의 말마따나 「聖德의 中産階級」(lES CASSES MOYENNES DE LA SAINTETE) 即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小市民 내지 庶民生活에 이러한 絶對者 이러한 神的인 것이 어떻게 「隆起」하고 있는가를 묘사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現代人은 宗敎體驗에 대해서 극히 회의적이고 이를 信任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체험이 一種의 感情의 倒錯과 狂信, 덧없는 空想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있으며 파괴와 건설로 연속되는 現實 앞에서의 逃避요, 덧없는 鄕愁와 공포의 뒤범버기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또한 종교적 체험을 일찌기 어머니 품에서 맛보던 일종의 충일감에 대한 어릴적 기억의 延長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로맹 롤랑(ROMAIN RALLAND)이 프로이드에게 보낸 그 有名한 편지에서 말하던 「大洋的感情」(SENTIMENT OCEANIQUE)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은 前近代와 前論理에로의 後退를 假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展望을 갖는 無信仰에서는, 神이 加護의 손길을 펴 주는 어느 아버지의 投影으로 나타난다. 이 아버지는 人間으로 하여금 投機와 모험 그리고 對決 가운데 自由로히 決斷해야 하는 어려운 고비를 마치 免除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成人意識이 强한 現代人이 이러한 神을 拒否할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 神의 無能과 無用
「하느님이라니? 무엇하려」 DIEU, POURQUOI FAIRE) 한때 人氣를 모았던 이 小冊子를 記憶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 世界의 現象界만을 놓고 볼 때 神을 이 現象界의 「說明」으로는 이미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 自然科學의 信條처럼 되어있다.
이러한 자연과학은 고사하고, 일반사람들도, 神이 이렇듯 살기 어려운 세상을 좀더 살기편한 세상으로 바꾸어 놓기에는 또한 세상의 온갖 災變과 「事故」를 豫防하는데는 쓸모도 없고, 그러기에는 너무나 無力하고 無能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神의 沈默」 「神의 失敗」는 神의 無能과 無用性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달리 알아들을 수 없다고 確信하고 있다. 2次大戰 直後 「빠리」의 大主敎로 활약했던 쉬아르 추기경(CARD SUHARD)은 말하기를 『우리는 人間을 神에게 接木하려야지 神을 人間에게 接木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神을 第2原因(CAUSAE SECUNDAE)의 水準으로 格下해서 하느님을 마치 어린애가 울면 달래주고 「큰 일」이 나기전에 이를 豫防하기 위해서 採用해 놓은 「保姆」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