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題(화제)를 찾아서] 土井(토정) 추기경 4월 18일 승인으로 한국인 지도신부 맞게 돼
재일교포 신자들… 30여년간의 숙원 풀어⇨모멸, 천대 속에
천대받는 유랑민·목자 없는 양떼들인 재일교포신자들이 오랜 숙원을 성취하여 한국인 지도신부를 맞게 됐다. 이에 오래전 성청허가는 받았으면서도 일본과 한국교회의 몰이해와 무관심 등으로 목자없이 헤메든 재일교포들이 석종관 신부의 노력으로 東京대주교 土井 추기경으로 부터 지난 4월 18일 한국인 지도신부 정식 초청허가를 받았다. 일제시대부터의 이 꿈이 성취되기까지 재일교포 신자들은 석종관 신부의 지도(공식적이 아님)를 받아 오긴 했다. 또 미국인 카로 신부(京都 한국인 신자 센타 설립자)와 독일인 지네카 신부의 도움과 지도도 받아왔다.
1935년경에 갈 신부의 성의와 지도하에 「빛」이라는 잡지도 발간하는 「동경가톨릭유학생회」를 설립하였다.
1940년에는 서울 노 주교와 대구 문 주교의 후원으로 「재동경 한국가톨학생회와 신우회」가 설립되었는데 신우회는 아직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
1942년에는 아동관을 건립하여 우리 신자들의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게 하였으나 제2차대전 말기에 폭격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1948~1958년까지는 石鐘寬(바오로) 신부가 지도의 책임을 지고 매주關口본당에서 오전 7시 30분에 교포신자를 위한 특별미사를 드리며 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동안 석 신부는 교포학생들의 기숙사를 건립할 꿈을 꾸며 교포학생 후원회를 설립하고 각계의 기부금을 간청하는 일까지 도맡아 동분서주했으나 석 신부가 사람을 과신한 탓으로 실패에 돌아가 버렸다.
1957년 석 신부의 지도로 「레지오·마리에·쁘레시디움」이 창립되어 그 당시는 동경에서 회원이 제일 많은 「쁘레시움」이었으나 지금은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1966년에 동경의 교포신자들이 「한국가톨릭센타」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金大榮(리노)씨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임시 셋집을 마련 「센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센타」의 유지비만도 매월 5만원 이상이니 생활난에 허덕이는 신자들에겐 노심초사일 뿐이다.
1966년부터 석 신부가 다시 지도자의 책임을 지게 되었으나 1백km 이상 떨어져있는 프란치스꼬 수녀원에 있으니 동경교포신자들에게는 유명무실하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67년 석 신부가 한국방문시에 여러 주교와 신부들에게 한국신부를 동경에 보내줄 것을 요청, 찬성과 동정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여년전부터 애써온 교포들을 위한 한국신부 파견은 일본의 사정 때문에 실현을 보지 못했다.
다시 작년 12월 15일 白柳 주교를 통해 土井 추기경에게 한국신부 초빙 허가 교섭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조선대학 인가가 내린 그 다음날인
즉 지난 4월 18일 白柳 주교가 전화로 「한국신부 초빙전」에 대하여 土井 추기경의 인가를 받았다고 석 신부에게 알려 왔다. 석 신부는 이튿날 白柳 주교를 방문하고 한국신부를 초빙했을 때의 신부의 생활문제를 협의 하였다. 이 자리에서 석 신부는 신부의 생활비는 교포신자들이 부담하겠는데 거주지는 당분간 대주교좌의 사제관의 방한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신부 초빙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당국도 재일교포에 대해 해방 후 금일에 이르도록 방관 내지 무관심한 채 지내왔다.
그러나 교포신자들은 한국민족으로서 천대와 고통을 날마다 당함에도 불구하고 선조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이국 일본에서 목자없이 악전고투하며 몸부림쳐 오던 중 이제 한국인신부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소원이 성취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