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⑥ 종교 상관없이도 信仰(신앙) 感情(감정) 지녀
구체적 인간, 보다 확실히 믿고 사랑하려 노력
발행일1968-05-12 [제618호, 4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종교를 믿는 사람의 생활이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중학교에서는 기독교를 배우고 대학에서는 불교를 배웠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쪽의 신도도 되지 못했다. 이것은 나의 생활에 있어 중요한 아름다움의 하나를 갖추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것은 내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수성이 가장 강한 시기 두가지 종교를 배우고서도 그 어느 하나도 믿음으로서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를 현대교육에 둘 수도 있을 것이고, 물질과 과학만능인 현대사회에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신앙을 가질 수 없었던 나 자신의 정신적 기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그러한 정신의 소유자 였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누구보다도 신앙적인 인간인지도 알 수 없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의리 있는 친구를 나는 믿어온 것이 아닌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무궁한 힘을 나는 믿어온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은 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옛날의 우리들의 조상이 살아 온 생활의 지혜 속에는 종교적인 것과는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신앙적인 정신의 기질을 많이 볼 수 있다. 임금이 사약을 내려도 한마디 원망이나 불평없이 그것을 받아 마시는 충신들의 임금에 대한 신앙,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배반을 해도 끝까지 그 임을 그리워 잊지 못하는 그러한 순수한 믿음은 종교적인 것과는 다른 것일까.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 모든 종교가 신앙의 기초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모든 신앙적인 것은 종교적 감정과 대단히 가까울 것이다. 그러한 신앙적 감정은 종교와는 아무 상관없이 인간의 여러가지 감정활동이나 생활의 양상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이나 생활 형식이 일정한 이념하에 신앙적 체계를 이룬 것이 종교는 아닐까. 만일 그렇게 볼 수도 있다면 종교를 너무 지나친 일정한 교의(敎義)적인 것으로서 가장 비종교적인 사람의 생활속에서 가장 종교적인 것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 두가지를 다 배우고서도 그 어느 한쪽의 신자도 되지 못했다는 것은 나의 인생을 퍽 공허하게 만들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대신 나는 구체적인 인간을 좀더, 확실히 사랑하고 믿는 정신을 길러왔다. 이것은 예수나 불타를 사랑하고 믿는 것보다는 훨씬 무가치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그렇게 기울어졌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도 소중한 것이 아닌가.
나이 오십이 다 되어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가끔 회의를 가질 때가 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정신의 상처가 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정신의 상처가 점차로 넓어져 왔다.
이럴때 나는 나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회복하려 할 것이다. 내가 기독교나 불교의 신도가 될 수 있는 시기는 어쩌면 그러한 노력이 실패했을때 일런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