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12) <第一話(제1화)> 나를 만나보시려면 ⑫
발행일1968-05-12 [제618호, 4면]
승재가 회사에 출근한 것은 며칠 후 이었다. 여느때 같으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또 술집으로 갔을 것이지마는 그는 슬쩍 빠져 나와서 발걸음이 집으로 향하였다. 마치 은희가 살아있을 때와 비슷하였다.그는 아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했기 때문에 술친구들에게 조롱도 많이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집으로 친구들을 피해가면서 까지 곧장 돌아가는 것은 벌써 여러달만에 처음이었다.
(이건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승재는 집으로 가는 뻐스 안에서 몇번이나 이런 생각이 솟아올랐다.
(성당 제단 앞에 가서 은희를 만나다니…)
그건 너무도 쑥스럽고 냄새를 풍기는 일이었다. 승재는 종교의 진수는 모르지마는 그 냄새는 잘 안다. 평범한 사람이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종교적 의식만을 존중할때 거기서는 코를 싸쥐고 싶은 악취가 일어난다. 이제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승재 자신이 하게된 것이다.
(쑥스러운 것이다)
승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마음에서 온갖 잡념을 떨어버려 주는 하나의 뿌리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환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은희의 모습이었다. 아니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마지막 임종때 은희는 분명히 정옥을 보고 승재 자신을 손까락으로 가리키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할듯 할듯 하다가 그만 힘이 다하여 자는 듯 눈을 감아버린 것이었다.
『글라라, 염려말고 눈을 감아요. 알았으니 조금도 염려말고 눈을 감아요』
정옥은 은희의 눈을 쓰러내리며 이렇게 목이 메어 부르짖었다. 그때는 모두 무심코 보아 넘긴 일이었으나 이제 생각하면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은희는 승재를 생각하여 정옥에게 부탁을 하였고 정옥은 은희에게 그 약속을 굳게 다짐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은희의 유언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환상이나 종교적 감상(感傷)은 아니었다. 승재의 마음에서 잡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마는 그를 은희의 유언으로 이끄는 힘이 단연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그 우세한 힘은 마치 은희가 살아있을 때처럼 승재를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뻐스 종점에서 내린 승재는 집으로 돌아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은희와 결혼한 후에 새 살림을 꾸미고 처음에는 주일마다 미사참례를 하여 전혀 서투른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승재는 이 핑게 저 핑게 성당에 가기를 게을리 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마음이 순수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성당 제단 앞에 가서 은희를 만난다는 것은 웃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형식적인 것이어서 자칫하면 냄새를 풍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로 걸어가는 승재의 발걸음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좋았다.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그는 그길로 가지 않으려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성당은 십오분쯤 걸어가는 거리에 있었다.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아담스러운 건물이었다. 그렇게도 열심으로 은희가 다니던 성당이었다.
지금 승재가 걸어가는 길에는 은희의 발자국이 수 없이 새겨져 있을 것이었다. 승재는 마치 무엇에 끌리는 사람처럼 그 길을 똑바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갑자기 부르는 소리가 났다. 막내아들이었다.
『너 여기 웬일이냐?』
승재는 깜짝 놀랐다.
『나 성당에 갔다 오는 길야. 그런데 아버지 어디가?』
『나 볼일이 있어서 잠간 다녀서 집으로 갈테니 빨리 가거라. 위험하니까 길에서 놀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
승재는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아버지, 집에 식모 아주머니 왔다.』
『뭐? 식모?』
『그래. 순녀네 엄마가 오늘 데려왔다. 인제 순녀네 엄마는 순녀 데리고 시골로 간대.』
『뭐라구? 누가 그러더냐?』
『순녀도 그러구, 순녀엄마가 식모한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어.』
『알겠다. 내 곧 다녀갈게 먼저 집으로 가거라.』
『네.』
막내아들이 깡충깡충 뛰어가는 것을 보고 승재는 다시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벌써 땅거미 지려는 황혼 무렵이었다.
(식모가 왔다구. 그러구 정옥이가 딸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간다구. 그래서 서둘러서 나에게 은희의 유언을 전했구나.)
승재는 어욱 어ᅟᅮᆨ한 황혼이 자기 마음속까지 스미어드는 듯하였다. 갑자기 짙은 외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을 뒤덮어 버리었다. 성당 앞에 이르렀다. 문을 조심스럽게 밀어 보았다. 꽉잠겨 있었다.
『조배 드리시렵니까? 미사는 끝났읍니다. 조배드리시려며는 저기 샛문으로 들어가세요.』
그림자처럼 고요히 나타난 수녀가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고맙습니다. 수녀님.』
승제는 고개를 수그려 정중히 사례하였다. 성당이 이렇게도 정답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다. 수녀도 마치친 누님처럼 정다워 보이었다. 승재는 성당으로 들어가서 제단 앞에 꿇어앉았다. 성당 안에는 이미 구석구석이 어둠이 서리어 있었다. 제단 위에 붉은 성체불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승재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참이나 앉았다가 고개를 들어 제단 위를 바라보았다.
『은희, 내가 여기왔오』
승재는 속으로 중얼거리었다.
『당신의 유언대로 나는 지금 당신을 만나려고 여기에 왔오. 물론 당신은 나에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진리를 따르라는 말이겠지. 그렇게 하리다. 그러나 내가 여기 왔으니 잠시 내 마음 속에라도 나타나 주구려.』
승재가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바로 곁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버지』
막내아들이 어느 틈에 따라와서 곁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