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司牧(사목) · 敎理硏究(교리연구)」 參席記(참석기) - 크리스찬 「메시지」의 바른 適應(적응) · 그릇된 適應(적응)
天主(천주)의 本質論(본질론)보다 日常事(일상사)서 시작해서
「메시지」와 人間(인간)과의 有機的(유기적) 關係(관계) 說明(설명) 필요
「메시지」 먼저 生活(생활)코
言語改革(언어개혁) · 「매스콤」 善用(선용)을
臨機應變的(임기응변적)인 適應(적응) 안돼
(承前) 현시대를 이처럼 본질적이며 인간학적인 견지에서 이해할 때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새로워질 것이며 실존적인 새로운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가능성들 중의 한가지만 언급한다면 앞으로는 천주님의 실재와 그 본질 연구로부터 더욱더 많이 구체적이오 역사적인 인간 예수 · 그리스도를 고찰하는 것이다. 진실로 인간이신 예수님은 그 인간적인 생활 바로 그 가운데서 초자연적 신비의 조명을 통하여 우리를 천주님의 계시에로 인도한다. 「메시지」의 기점(起点)은 다기(多岐)하나 극점(極点)은 부활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길이며 이 길을 따라 우리는 성사에로 은총에로 그리고 성부에게로 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방법의 적응문제에 논급함에 있어 과거에 경험하고 시도해 본 방법들이 허다했다고 해서(물론 그것들도 중요하지마는) 그것들이 급선무의 문제가 될 수 없고 먼저 근본적인 새로운 계몽이 더 긴요한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임기응변적인 적응(適應), 즉 인간을 그의 약한 상황을 노려 기습하는 교활한 계략을 배격한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할 줄 모르는 그러한 타산적인 것을 배격하고 신앙을 필요로 하는 그 본인의 동의와 수락이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적응이 벽두에 겪는 난관은 표현, 즉 언어의 문제다. 현대인의 언어에로 근본적인 개종이 있어야 하겠다. 과거의 그 격식적인 표현과 교리의 술어를 포기할 수 없는 한 그것들은 여하간 언제나 낙후되어 「메시지」 전파의 일선에 나서지 못한다. 난해한 언어는 명확성과 보다 나은 이해를 기할 수 없으며 그것은 한갖 지식인들의 호사심을 만족시킬 뿐이리라. 「메시지」 전파란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이며 심정에서 울어나는 말을 해야 할진대 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데는 우리 世代의 언어로 고쳐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점에 있어 대선생님이셨다. 설득할 사람은 먼저 이 「메시지」가 내면적으로 자기자신의 것이 되어있어야 할 것, 자기 자신의 말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 자기의 진정한 종교적 체험에서 말해야 할 것 등이 중요하다.
우리는 의사전달의 현대적 방법인 「매스코뮤니케이션」에 대하여 크게 당황하고 있다. 구제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의 인간들에게 많은 관련을 맺지 못한데는 우리가 이 「매스콤」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언어는 표현형식이요 기도이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 속에 우리는 「메시지」를 표현시키고 또 설명할 그 언어에 대하여는 특히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하겠다. 이 언어고찰에 있어서는 독특한 것에 치중하기 보다 오히려 순수와 성실을 추구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메시지」는 인간에게 보내진 것이다. 인간의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인 어떤 구체적인 상활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금일의 인간은 물론이요, 그 인간의 주변을 싸고도는 그들의 문제 노력 욕구 등도 중요하다. 천주님과 또 그의 「메시지」의 안중에는 인간이 관심사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메시지」를 위하여는 추상적인 본질, (예컨데,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라는 것 등)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구체적인 생활, 원의, 기대, 의사, 사고, 및 기질과 노력까지도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종교적 지식의 중개만으로는 되지않고, 오직 인간과 관계된 풍부한 지식만이 종교적으로도 효과적이다. 생활관계가 뒤따르지 않는 곳, 거기에 지식이란, 비록 종교적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입만 놀리는 독경(讀經)으로 공허하여 곤 잊어버리기에 알맞다.
예수님은 인간을 찾아 지상으로 오셨다. 천주님이 우리한테 오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다. 그와같이 우리의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도 당장에는 알아 들을 수도 없는 숭고한 천주님의 본질론에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일상생활 속에 사는 인간에서, 그 생활체험과 그 기대에 출발점을 두어야 한다. 인간을 찾아가고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며 계략적이 아니라 첫번부터의 접해(接解)의 계기가 사람에게 흥미로워야 한다. 모든 생활체럼 비록 어떤 종류건 그것이 출발이 딛임돌이 되면 되는 것이다. 「스포츠」, 유행음악 웃음과 눈물 모성 노동 학교 실망 고독 희망 행복 결혼과 사망 등등. 말을 들어 줄 상대방을 인사하고 알고 지내면 된다. 동시에 그것이 그 사람과의 가능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는 「메시지」 전파를 위하여 딛임돌이 될 이 출발점을 찾는 훈련이 별로 되어있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아는 훈련은 더욱 되어있지 않으며 당장 도덕적인 결론만 따지고 왔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통한 인간적인 접촉이 얼마나 깊은 의의가 있는가는 「메시지」에 명시되어 있는 바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외면할 수 없다. 천주님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한 것만큼 천주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데도 똑같이 많은 시간을 요해야 한다.
이와같은 일반 인간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현시대의 인간은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장점들도 있어, 이 좋은 소질을 그 최대한도까지 살린다면 구세와 십자가, 은총, 천국, 부활 및 신앙의 「메시지」를 능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소질과 노력은 또한 각종 문화와 민족의 그 사회상의표현으로도 나타나며 한민족과 국가는 역사적으로 특유하게 부각된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 등을 통하여 그들의 방법과 노력을 찾아야 한다.
복음의 광명은 그 구세의 빛으로 각 민족의 좋은 소질을 비춘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인간적인 진가를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전신경을 기울일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성공적이요 희망적인 광명을 외부로부터 비춰주지 못하고 있다. 깊은 반대방향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종교경험과 고유이 문화적 가치의 결함이 그 결실로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 즉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하나의 새로운 부각이 이루워지는 것이다.
결국, 적응은 외부적인 동화가 아니고 내부로부터 울어나오는 하나의 활동적인 강력한 개신인 것이다. <끝>
엘리사벹 케르켈링(AFI(국제여자협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