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信者(비신자) 史學家(사학가)가 본 丙寅殉敎(병인순교)의 史的意義(사적의의)
朱子學(주자학)의 不可侵的權威(불가침적권위) 綿綿(면면)한 李朝(이조)
封建的社會(봉건적사회) 開化(개화)에 寄與(기여)
民族的(민족적) 精氣(정기) 發揮(발휘)이기도
24位(위) 諡福(시복)을 앞두고
새로운 文化의 傳達受容에 있어 調和와 葛蟒은 一律的으로 作定해서 얘기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이 精神的인데 있어서는 葛藤이 激甚하여 그것이 相互 死鬪를 하는 경우가 많다. 韓國에 佛敎가 傅할때 그러했고, 다시 儒敎가 그 精神的인 基盤을 構築할때, 佛敎의 現實的인 權力基盤에 挑戰을 하였었다.
麗末鮮初의 排佛論은 곧 高麗王權의 약탈과 直結되었었다. 思想的인 變革이 그대로 觀念의 變革에서만 이루어기는 것이 아니다. 現實의 權力과 密着된데서 처참한 일도 있으며, 또 精神의 現世的 基盤의 構築에 現世的 基盤의 構築에 있어서도 權力의 背景을 欲求하기도 했다.
李氏朝는 創建과 同時에 朱子學的인 理念을 朝鮮現實에 쐐기로 박았으며, 그 觀念의 世界를 强要하는 權威는 以後 거의 李氏朝 全期間을 統制하였었다. 그러므로 朱子學的 權威는 不可侵의 것으로 君臣의 倫理로, 또 家族倫理로서 儒敎的 自然法的 精神은 朝鮮人의 現世的 生活에 있어 思惟와 行爲를 强力히 支配하였다.
여기에서 어긋날때 그를 「斯文의 亂賊」으로 처형한다는 論理는 歷史的인 條件은 여하턴 오늘에서 본다면 어딘지 정신적으로 偏向的이고 閉塞的이었다.
이러한 絶對한 精神世界에 도전한 것이 새로傳來되는 西學이었다면 우선 歷代의 天主敎탄압의 精神史的一面은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될 것 같다. 그러나 원래 天主敎가 朱子學的인 絕對世界이었던 李氏朝社會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李쉬光은 當時로는 開放的이었던 知識受容의 寬容的 學者로서 西學에 흥미를 갖고 소개했으나 肅英間의 李익(星湖)은 西學을 儒敎主義的인 認識基盤에서 受容하였고 보다 合理的인 面을 追求하는데서 西學을 儒敎와 비교하여 그 合理的이고 새로운 精神面을 論하였다. 星湖門下 내지 그 後學들은 星湖의 認識態度와는 달랐다. 儒敎의 精神世界에서 볼 수 없는 다른 世界에 뛰어들었다. 녹암 權哲身 같은 이가 星湖後繼의 代表的 儒學者로 天主敎의 信奉者였다.
正祖乙巳(1785) 辛亥(1791)부터 問題가 되었지만 正祖의 寬容과 南人執權下에서는 迫害를 면할 수 있었으나 純祖辛酉(一八◯一)의 敎難에서부터 성혈의 亂鬪로 展開되었으니 天主敎徒側에서는 敎難이었으나 執權層으로는 南人時벽의 抗爭에서 西學信奉을 트집잡아 南人時派를 때려모는 權力의 擁護이었다. 물론 내세운 일은 「無君無父」니 하여 儒敎倫理에 어긋난다는 것이었고 儒敎的 四民論에 據하여 執權屠이 自己權力의 擁護를 꾀하여 내세운 儒敎的 自然法의 固守의 主張이었다. 그럼 우리 近世史에 있어 反가토릭的 문헌을 보면 그 反對理由가 一律的으로 論理가 없었다.
憲宗己亥(1839年)에 있어서도 世界觀의 抗立的인 論爭보다 急作히 휘몰아치는 迫害의 旋風에 敎徒들은 당황하였다. 丁夏祥은 그의 「上宰相害」에서 오히려 「天主實義」가 지니는 가토릭적 倫理와 儒敎倫理가 어긋남이 없다고 하며 성혈의 旋風을 멎게 하고자 하게까지 되었었다.
역시 그도 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己亥殉敎者들은 福者로서 시복의 榮光을 누리었으나 高宗 3年 丙寅(1866) 殉敎者에 對해서는 시복이 黙過되어 왔다. 이제 그 榮光을 돌리게 된 것은 韓國사람의 한사람으로 기꺼운 일이다.
丙寅迫害에 對해서는 때마침 韓佛양쪽의 基本資料에 依해 韓國敎會史硏究所의 崔석우 神父님의 「丙寅迫害資料研究」(1968)가 있어 그 全貌를 새로 밝히어 알게 되었다.
이제 丙寅迫害의 歷史的性格을 본다면 물론 앞서본 儒敎倫理와의 相衡에서 오는 條件도 內包하고 있지만 高宗時代는 極東에 밀려 다구치는 西歐의 資本主義勢力의 接近 浸透가 大院君으로 하여 天主敎만이 아니라 一律的으로 外勢를 배격하게 하였다.
1668年까지 西歐勢力(資本主義)이 朝鮮에 接近하며 朝鮮을 넘본일은 모두 外部에서부터의 자극으로 大院君을 排外的인 대로 몰았다. 여기에 끼어든 天主敎徒들은 大院君의 激突에 부딛친 것이다. 當時 迫害를 信徒의 身分的 構成, 特히 女敎友가 많았다든지 歷代의 敎難에 比해 殉教者數가 보다 많았다든지 더 殘忍했다든지한 것은 天主敎의 朝鮮傳播가 幅넓히었음과 同時에 封建制 朝鮮의 社會的 分化를 意味한다. 社會와 같이 展開된 가톨릭信仰이 分化된 社會의 迫害에 부닥친 것이었다. 「朝鮮」은 丙寅迫害가 함께 果然西洋의 侵入을 몸소당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에 척邪派의 유가들은 邪學徒를 죽이라, 洋物을 쓰지마라, 洋物을 쫓아내야지 나라를 保存할 수 있다. 通交를 하지 않아야지 洋賊을 물리칠 수 있다… 酷毒히 主張한 丙寅척和疏에 흐르는 一聯의 유家들의 西洋排擊論은 곧 西歐資本主義의 排擊이었다.
여기에 끼어든 天主敎徒들의 殉敎는 「朝鮮天主敎迫害史」에 있어 最後의 빛이었다. 信心의 빛은 朝鮮天主敎史에만 남긴 것이 아니라 強直‧純粹한 精神을 宗敎와는 달리 民族的 精氣로 推仰된바 이 点에 對해서 우리 가톨릭史를 펼치는 사람은 누구나 새삼 놀라는 事實이었다. 이제 이러한 事實을 널리 推仰하는 丙寅殉敎者의 諡福은 當然한 일이다. 이러한 不屈의 精神은 가톨릭社會에서는 물론이지만 韓國史의 광휘로 높이어 다루어온바다. 이제 이것을 더 드높이게 된 데에 歷史的 意義를 찾고 싶다. 國際途上의 韓國은 그後 天主敎信奉을 하게 되었음을 볼때 성血로 点綴된 우리 歷史에 그 빛은 永遠히 後光으로 남게 되었다.
洪以燮(延世大學校?授·韓國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