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1월 브라질에 도착한 이래 내가 떠난 1967년 3월까지 만16개월동안 동분서주 이민들의 정착사업을 위해 뛰어다닌 보람이 있어 지금은 어쨌든 남아있는 28세대 만이라도 자급자족을 할만치 기반이 잡혀있다.
양계조합에서는 닭을 1만5천수 기르고 있어 하루8천개의 계란을 수확하고 있었다. 양계조합의 강(姜鎭根) 씨는 그래도 자기의 사업이 뜻했던 대로 잘 진행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 현황을 설명해 주었다.
브라질의 기후는 우리나라 대관령(大關嶺)과 비슷해서 콩 · 벼 · 모밀 · 옥수수 · 감자 같은 것이 펄 잘된다.
내가 있을 때 12세대가 약30RK를 경작하였는데, 쌀은 1RK당 7백가마를 거둘 수 있었다. 1RK는 우리나라 평수로 따져 약7천2백평인데, 30RK라고 하면 2만2천평이나 되는 지역을 경작한 셈이다. 기후관계로 모밀 · 옥수수는 9월에 파종하고, 벼와 콩은 11월초에 파종하는데, 상당량의 쌀과 콩 · 모밀 · 감자가 수확되었고, 시험조로 심어본 참외 · 오이 · 수박 등이 처치 곤란할 정도로 대풍작을 이루었다.
다른 양곡은 저장할 수 있지만 야채류는 저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실컷 먹다 남은 것은 돼지먹이로 쓰고 농작물의 절반 이상을 각 신학교에 통고해서 무료로 가져가도록 분에 맞지 않는 기부 행각까지 해야할 지경이었다.
금년도에는 저장할 수 있는 양곡생산에 중점을 두어 작년의 배 이상인 70RK 경작을 할 예정인데 그것이 성공하면 「산따 마리아」 농장의 정착사업은 우선 안정되는 셈이다.
내가 현지에서 느낀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영농장비의 현대화이다
지금 몇대의 경작기와 수확기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이고, 본격적인 영농사업을 하려면, 현대식 장비를 갖추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지난번 수확 때도 제대로 수확기를 갖추지 못해서 상당히 곤란을 받았다. 주 정부에서 빌려주는 것도 있지만, 수요자가 많기 때문에 웬만해 가지고는 차례가 오지 않는다.
하도 답답해서 한국에서처럼 낮으로 베고, 마당 타작을 해보았으나, 드넓은 경작지에서 실려오는 산더미 같은 수확물이 일손 모자라는 그곳에서 제대로 처리될 수가 없었다.
기계 없이 농사짓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와 같은 입지조건 아래서만 가능한 것이지, 대규모 농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브라질 이민은 용감하였다. 비록 3분의 2가 이탈해서 도회지로 떠나버려 하루 하루, 농가의 불이 꺼져가는 구슬픈 현실이었으나, 남아있는 동포들은 혀를 깨물고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폰따 그로싸」시에서 32 「킬로」나 떨어져 있으니, 도중에 「가솔린」이 떨어지면 곤란하다는데 착안하여 정식 규격에 맞는 주유소를 세우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주 정부와 그밖에 여러 유지들의 도움으로 3만 「달러」를 들여 식당 겸용의 벽돌집 주유소가 아담하게 세워졌다. 이것은 브라질에서도 제1급에 속하는 고급 주유소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소비조합과 이민들의 공동이익을 위한 여러가지 협동체를 만들어 이제 「산따 마리아」 농장은 적은 세대이긴 하지만 아담한 살림을 차려 새 천지를 이룩하기 위해서 전진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결론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민을 하려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 다 같이 이민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상이몽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
張大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