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결코 신은 합리적인 것으로만 보일 수는 없다.
현기증 날만한 신앙의 불확실성은 신의 현존(現存)에 불가피한 동요(動搖)를 가져온다. 여하튼 신은 언제나 남몰래 숨어 있는 것 같다. 신은 단한번도 내손이 내눈앞에 보이는 식으로 드러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은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서 오직 신앙을 통하여 나와 개별적으로 상봉(相逢)하는 주체(主體)로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역설 같지만 신은 신이되기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다시 현대무신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깊은 진리를 터득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리라고 주장한 사르뜨르의 말은 옳다. 칼·야스퍼스가 『증명된 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서술할 때에도 같은 의미를 표명하고 있다.
신은 인간지성(知性)의 이론적 수긍(首肯)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한다.
신은 우리에게 탐구적(探求的)이면서도 고뇌에 찬 전인격(全人格)의 위탁(委託)을 요구한다. 그러나 신은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결코 강요(强要)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너무나 존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 어떤 이에게는 불현듯 세계에는 신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니체의 광인(狂人) 이야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진리의 메아리가 아닌가?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듯이 살 때에는 비록 살신자(殺神者)가 미쳐 깨닫지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신은 벌써 인간 생활 속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또한 왜 신은 이따금 성실한 신자의 생활에서 까지 일시적으로 그 존재를 감추어 버리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을 영구히 잃지는 않았다. 신은 우리가 더욱 새롭고 심오한 상황에서 그의 모습을 찾고 또한 재발견하기를 바란다.
이글의 첫머리에서 신의 부재(不在)와 신의 귀환(歸還)을 고대(苦待)하는 체험을 말하는 블라디밀과 에스트로겐의 연극은 어느 신자에게나 놀라우리만큼 실감나는 현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신이 누구인지를 항상 새로이 찾아낼 필요가 있다.
풀·틸리히가 말한 대로 『실로 과감(果敢)한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을 항상 창조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의혹(疑惑)을 활용하는 사람이다』 결단(決斷)은 우리가 가질 태도다.
위기에 직면할 때에 신은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오직 새롭고 내밀(內密)한 방법으로 우리가 위기를 신앞에 개방할 때에만 그러할 것이다. 신앙생활은 항상 위험한 모험의 길이다.
이 사실을 가장 잘 깨달은 이는 아마도 『신을 찾는 이는 이미 신을 발견하였다』라고 말한 파스칼일 것이다.
(끝)
폴·데쉬 記(데트로이트市 던스·스코터스대학교수)
李洪根 신부 繹(경북河腸본당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