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내게 있어 엄청난 형벌의 계절이다. 도무지 어떻게도 처리할 수 없는 권태감과 무기력으로 하여 매사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지난 여름은 실로 위대하였읍니다』라고 릴케는 노래하였거니와 여름의 무성한 녹음, 그 싱거러운 숨결이 과연 놀랍지 않은 바는 아니다. 신록이 처음 피어나는 초려음의 산속에선 마주 부여잡고 통곡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고 우리의 영혼이 것잡을 수 없는 신명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바다의 푸른 손짓이 우리를 부르고 은근한 산의 눈짓이 우리를 매혹하는 계절이 또한 여름이기도 하다.
이렇게 여름은 여름나름으로의 낭만과 꿈과 아름다움을 지닌다.
그러나 저 상코해게 부서지는 파도로도 맑은 산바람으로도 지쳐빠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달랠 수는 없다. 주체할 길 없이 나른한 몸둥아리, 영혼을 뽑아버린 인간…, 스스로를 두고도 가장 짐승스러워지는 느낌을 금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여름철이다.
며칠이고 몇 밤이고 폭우가 쏟아붓는 장림의 계절, 혹은 나날이 똑같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은 불볕의 염천 아래선 삶에이 좌절감 마저 올 때가 있다.
『도시 인간이 얼마나 나이를 머겅야 계절이나 날씨에 감정이 구애받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어느 시인이 통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다 계절에 따르는 별난 느낌들이 있겠는데 아뭏든 나의 여름 공포증 내지 혐오감은 좀 심한 편이었다. 남드이 흔히 떠나는 대천이나 만리포 해운대 속초 등 바닷가를 찾아 보기도 하고 몇 군데 산을 가보기도 하였으나 돌아올 땐 빈번이 잔뜩 더위를 먹고 오기가 일수였다.
별수없이 나는 몇 며름 동안 강한 자외선 피하여 조그만 내 방 안에 들앉아 지냈다.
창에는 대나무 발을 늘이고 짚방석 몇개, 탁자 위엔 몇 송이이 꽃, 고목 등걸에 매화가 만개한 합죽선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여름을 내몰려고 애를 썼다. 축축히 젖어있고 권태롭고 지루하기만 한 아렴을 나는 이런식으로 차츰 퇴치하게 되었다.
올해도 벌써 7월로 접어들었다. 곧 삼복의 더위가 숨가쁘게 다가 들리라. 거리 거리마다 분수가 치솟고 고궁의 나뭇그늘을 찾는 손들이 늘어간다.
『곧 「바깡스 붐」이 일테지…』.
나는 또 발과 방석과 부채의 먼지를 떨고 챙겨놔야겠다. 수박이나 몇 덩이 사다가 여름에 채워놓고 하루에도 수삼번 드이리에 냉수를 끼얹으면 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묘를 따라 뜨거운 백미탕에 꿀이라도 몇수깔 듬뿍 타서 훌훌 마신 뒤 솟아난 땀을 합죽선으로 식힌다면 충분히 운치가 있으리라.
글 許英子(啓星女高 敎師)
그림 金光培